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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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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관*자 조회수 410
한국 민주화의 지도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88년간의 파란만장한 생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다음의 두 사람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박정희 전대통령이고, 다른 한 사람은 김대중 전대통령입니다. 박 전대통령이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적으로서 투쟁의 대상이었다면,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협력자이면서도 정치적 경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대학 2학년 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인 외무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인연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장택상씨를 통해 약관 20세에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당에 입당해서 26세의 나이에 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당 입당 7개월 만에 이승만의 3선개헌을 반대하면서 탈당했고, 이어 민주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야당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신념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정치란 바다에 투신한 이래 줄곧 민주화 투사였고, 그의 민주화를 향한 투지와 투쟁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했고, 대변했습니다. 그의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외침은 시대적 웅변이었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고조시켰습니다. 김 전대통령의 리더십은 저돌적인 돌파형이었고, 군더더기가 없는 직선형이었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는 신들린 사람처럼 정치적 직감이 빨랐고, 그의 정치적 순발력과 판단력은 그 어떤 정치인도 경쟁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신정권은 그의 정치적 투쟁의 발단이 되었고, 군정종식을 외치면서 하나회를 숙청하고, 기무사를 재편하고, 독재정치와 군부정치, 일제식민정치의 잔재들까지 모두가 청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공직자 재산등록을 의무화시켰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음성적인 부패자금의 흐름을 차단시켰습니다. 5.18특별법을 만들어 두 전직 대통령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것도 그의 업적으로 기록됩니다. 김 전대통령과 함께 민주화투쟁의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였던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영삼 전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씨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 참 많지만, 그는 첫째, 다른 야당 지도자에 비해 뛰어난 용기를 갖고 있다는 점, 둘째, 정치적 흐름을 빨리 파악하는 센스가 발달해 있고, 그 감각이 틀리지 않아 방향을 잘 잡는다는 점, 셋째, 일관된 민주주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 넷째, 포용력이 있고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는 점이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크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반면에 김영삼 전대통령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내가 김대중씨를 세삼 존경하는 것은 참 어려운 시대에 살아왔는데도, 좌절하지 않고 이 시점까지 용기를 가지고 올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참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노력을 그 만큼 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그 탄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이 두 정치적 거목은 서로를 용기있는 정치지도자로 평가했습니다. 이 양김의 용기가 한국의 정치민주화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던 한국 정치의 거목 김영삼 전대통령의 큰별은 22일 새벽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별이 이룩한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이 숨 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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