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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의 시사탱크 - 장성민의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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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외교 전모 & 역사교사, 편향 수업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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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5관리자 조회수 393
500여 년의 조선 역사 가운데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군주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왕이 바로 정조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다름이 아니라 과거논쟁으로 나라의 오늘과 미래를 탕진하고 있는 작금의 한심스런 정치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정조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뙤악볕 쥐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였습니다. 당시 11살이었던 어린 정조가 가슴속에 품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부친을 죽인 세력들에 대한 ‘한’ 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들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정조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자식이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강세자의 양자로 입적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모든 대신들을 불러놓고 자신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세력들은 등골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오싹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대당파라 할지라도 국왕이 자신들을 숙청을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세력들을 피로 응징했던 연산군과는 달리,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 세력들에 대해서 보복과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정조의 실용정신이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정조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노론과도 공존을 모색하면서 국정을 안정화 시킵니다. 때로는 노론과도 타협을 하면서 미래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또한 정조는 소외된 남인들을 등용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층을 보듬고, 비록 서자라 하더라도 실력과 능력을 보고 사람을 발탁했으며, 학력, 지역, 당파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유교사상을 숭배하던 조선시대에 서자가 관료로 등용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론파가 성리학과 주자학을 핵심 이념으로 받들었지만, 정조는 천주학과 서학을 허용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추구한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정조는 결코 성리학의 이념에만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조의 최대 업적 중의 하나는 흉년의 원인으로 유민을 발생시킨 가뭄의 극복이었습니다. 정조는 가뭄과 홍수에 대비해서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농장에 물을 제공해서 풍작을 이루게 한 왕이었습니다. 지금 지방에는 가뭄으로 목이 탄 국민들이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국민들의 원성을 뒤로한 채, 이념전쟁, 역사전쟁에 빠져 있습니다. 감정대립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훌륭한 군주는 가뭄과 홍수로부터 백성을 구하는 정치력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인터넷시대에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는 가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니 정조로부터 무엇을 취해야 할까요? 지금 정치인들은 가뭄, 한해 지역으로 뛰어 내려가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지역주민들 그리고 중앙관료들과 힘을 합쳐 가뭄에 허덕이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을 구해 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치인 것입니다. 오늘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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