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이미지

교양 매주 일요일 저녁 7시 50분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식객 허영만이 소박한 동네밥상에서 진정한 맛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프로그램

백반일기

백반일기
37회 맛있는 로망을 담은 인제 평창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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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7관리자 조회수 4662

<맛있는 로망을 담은 인제평창밥상>


아빠라면 누구나 한 번쯤 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죠.

저도 표현에 서툰 무뚝뚝한 아빠인지라

그저 마음속에 로망으로만 지니고 있었는데

백반기행을 통해 딸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요 녀석이 막내라 제겐 여전히 아기 같기만 한데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됐습니다.

애들 키우다보면 체력이 동날 때가 많죠.

어디로 가야 딸에게 보양을 시켜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겨울 진미가 가득한 인제·평창으로 결정했습니다.

대관령부터 인제 용대리까지-

황태 로드를 따라 아빠들이 딸에게 먹이고 싶은 음식들로 엄선했습니다.


한계령 자락의 한 동네로 향했습니다.

한 겨울에도 푸릇푸릇한 나물 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서 찾아갔는데

한적한 산골 마을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찾아가는데 꽤나 애먹었습니다.

이곳 인기메뉴는 산채정식과 질경이 가마솥 밥 정식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질경이가 여자한테 좋다고들 하지요.

고민 없이 질경이 가마솥 밥 정식을 시켰습니다.

잠시 후 기본 찬이 나오는데 산나물 반찬만 무려 12가지가 나옵니다.

산이 깊을수록 나물도 많다더니, 강원도답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게 죄다 보기 드문 산나물들인데,

주인장 내외가 봄에 입술 부르트도록 직접 캐온 것들이라네요.

딸아이의 표현에 의하면 순둥순둥한 맛의 산고추나물부터

홋잎나물, 엄나무순, 다래순 등 향긋한 나물들이 입맛을 돋웠습니다.

이곳은 소량의 소금 간과 들기름만 둘러 무쳐냅니다.

그래서인지 각각 나물마다 개성이 뚜렷하더군요.

나물 하나하나 맛보니 어느새 밥상의 주인공 질경이 가마솥 밥이 등장했습니다.

주문과 동시에 솥 밥을 갓 지어내는데 밥이 어느 정도 끓으면

들기름에 볶은 질경이를 마지막에 얹고 뜸을 들여 내더군요.

밥은 고슬고슬하고 향도 풋풋하니- 얼른 한술 먹어봤습니다.

지천에 흔한 질경이로 밥을 하면 무슨 맛이 날까 궁금했는데

마치 시래기 밥과 비슷했습니다.

여기에 주인장이 직접 띄운 된장·청국장찌개가 구수함을 더해줍니다.

배불러 숟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남은 나물 반찬들을 외면할 수 없겠더군요.

열 가지가 넘는 산나물을 조금씩 넣고 거기에 된장·청국장찌개를 넣어서 비볐더니

감탄이 절로 나는 맛이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남길 수 없어 또 한 그릇 비우고 말았습니다.

질경아, 너는 이제 주인공이 아니다!



다음은 대관령으로 향했습니다. 겨울이면 스키장을 찾는 이들로 활기 넘치는 이곳에

이른바 스키장 맛집으로 통하는 곳이 있습니다.

54년 역사를 자랑하는 식육 식당 노포인데, 가게 안을 들어가 보니 구조가 독특하더군요.

세월이 흐르면서 마당을 홀로 바꾸고, 본채와 사랑채, 별채가 한 지붕 아래로 이어졌습니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더니, 젊은 손님들이 주를 이룹니다.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게 냉동 삼겹살이라기에

저희도 따라 주문했는데 식빵을 같이 내주더군요.

이 식빵은 고기 기름을 빼는 용도랍니다. 그러고 보니 불판에 기름 빠지는 구멍이 없더군요.

식당만큼이나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이 불판은 시어머니 대부터 쓰는 건데

전라도 장수 곱돌로 만든 거랍니다.

모처럼 딸아이가 구워주는 고기 맛 좀 보게 됐습니다.

이 집은 생삼겹을 들여와 직접 급랭을 시킨다는데

냉동 특유의 육즙도 빠지지 않아 기대가 됩니다.

한 점 먹어보려는데 딸아이가 웬일로 쌈을 싸준다더군요.

이게 뭐라고 이리도 애틋하고 좋은지 근래 먹어본 삼겹살 중에 최고였습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떠오른다는데-

먹는 내내 제 남편과 연애 때 삼겹살 먹었던 얘기를 하더군요.

아빠는 뒷전인가 봅니다. 내심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집 삼겹살은 진짜 주인공을 만나기 위한 관문(?)이라는데요.

바로 고기 굽던 곱돌에 그대로 부어주는 냉이 된장찌개입니다.

주인장이 직접 담근 된장에 향긋한 냉이로 품격이 더해진 된장찌개는

3단계로 맛을 볼 수 있답니다. 먼저 1단계, 본연의 맛을 보고,

2단계로는 소면 사리를 추가해 된장국수로-

마지막 3단계는 밥을 넣고 자작하게 말아먹습니다.

솔직히 저한테는 짠 기가 없지 않아 있었지만

시골 된장의 시큼 텁텁한 맛이 꽤나 반가웠습니다.

강원도 된장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54년 전통의 맛입니다


바람과 햇살, 그리고 추위가 만들어내는 겨울 진미 황태를 맛보러

인제 용대리로 향합니다. 현지 분들의 숨은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는데

반찬이 나온 걸 보니 단박에 알겠더군요.

8,000원짜리 황태국밥 하나 시켰을 뿐인데 기본 찬이 웬만한 백반집 뺨칩니다.

황태 식해 내주는 황탯집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아쉬웠는데

이곳은 황태 식해뿐만 아니라 오징어 식해까지 내줍니다.

여기에 명태 아가미를 넣어 시원한 맛이 일품인 섞박지와

주인장의 바깥양반이 캐온 자연산 곰버섯과 싸리버섯까지 볶아서 내줍니다.

메인인 황태국밥은 사골 국물 같은 뽀얀 빛깔이 인상적입니다.

국물은 간이 하나도 안 된 상태에서 나오는데 각자 입맛대로 맞춰 먹도록

새우젓이 달려 나옵니다. 소금이 아니라 새우젓을 내주는 것도 참 맘에 듭니다.

국물을 한입 먹어보니 끝에 쌉싸름한 맛이 감돕니다.

대개 황탯국은 살만 발라내 끓이는데 이집은 황태를 통째로 넣어 끓인답니다.

그런데 계속 먹다보니 어느새 황탯국 편에 서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전날 술을 안 마신 게 후회될 정도로 이 국밥 하나면 숙취도 끄떡없을 것 같더군요.

속이 뜨끈하게 확 풀리는 황태국밥, 겨울 진미로 손색없습니다


황태 못지않은 강원도 별미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식당을 찾았습니다.

42년 째 성업 중이라는데, 불판에 구워먹는 더덕 · 황태 · 오징어불고기

3가지가 인기 메뉴랍니다. 양념은 주인장이 직접 담근 고추장을 베이스로 만든다는데

재료에 따라 살짝 변화만 주면서 어떤 재료에나 두루 쓰입니다. 아주 만능 양념이죠.

먼저 강원도의 산과 바다를 대표하는 맛, 더덕과 황태를 굽습니다.

그런데, 이곳 불판이 참 독특하더군요.

불판 아래 군데군데 구멍 난 철판이 한 겹 더 깔리는데

불맛도 내면서 양념 묻은 음식들이 잘 타지 않게

주인장이 직접 주문 제작한 거라네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잘 구워진 더덕과 황태를 한 점 넣는데,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는 달달하더군요.

반면에 딸은 술을 부르는 맛이라며 어찌나 잘 먹던지

젊은 세대 입에는 제격인 듯 했습니다.

더덕과 황태를 맛봤으니 오징어불고기도 먹어봐야겠지요.

주인장에게 단맛을 낮춰 달라 번거로운 청을 넣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양념을 버무리기 때문에

평소에도 손님들 입맛에 맞춰 조절해준다더군요. 다행입니다.

적당히 구운 오징어불고기를 입에 넣어봅니다.

이번에도 달면 어쩌나 싶었는데 제 입맛에 아주 딱이었습니다.

주문진에서 올라온 선동 오징어라 그런지 탱글탱글하니 식감도 좋고

칼집 사이사이로 양념도 적당히 잘 배어 있는데다가 불맛까지 더하니

딸아이 말처럼 술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맛있는 불맛이 더해진 강원도 맛의 삼총사. 이거 참 별밉니다


내린천을 따라가다 호젓한 동네를 만났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식당은 30년 넘게 가마솥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해장국 집인데요.

마침 가게 앞에서 주인장을 만나 김칫독 구경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요. 정자에 세워둔 작은 문짝을 치우니

방공호 같은 김치 움이 등장합니다. 원래는 자그마한 연못이었는데

주인장 바깥양반의 솜씨로 움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1년 치 먹을 김장을 전부 저장했었는데

이상 기온으로 날이 따뜻해지면서 겨울철 먹을 것만 저장하고

나머지는 저온창고에 넣는답니다.

기본 찬은 김장김치에 깍두기로 단출하지만, 김장김치 맛이 일당백이더군요.

양념이 과하지 않으면서 강원도 김치 특유의 시원한 맛이 끝내줍니다.

해장국 집에 왔으니 해장국을 먹어야겠죠.

해장국 건더기를 보니 선지부터 양, 허파, 콩나물, 시래기까지 푸짐합니다.

건더기가 많으면 국물이 탁해지기 쉬운데 국물이 유난히 맑고 투명한데요.

첫 술에 보기 좋게 기선 제압당했습니다. 흠 잡을 데 없이 맛있더군요.

이곳이 얼마나 맛있는지 7살 꼬마 손님도 그릇 째 둘러 마십니다.

이 맑고 진한 국물의 비결은 소 허파 삶은 국물에

소의 두 번째 위장인 벌양을 넣고 푹 우려낸 뒤

집된장을 풀어 살짝 간을 맞추고 수삼을 갈아 넣어 맛을 끌어올려줍니다.

여기에 각자 입맛에 맞게 고춧기름이나 삭힌 고추를 넣어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삭힌 고추는 여름에 거두고 남은 고추와 청양고추를 섞어 염장하는데

살짝 새콤한 기운이 감도는 칼칼한 맛이 납니다.

사실 이 집에는 해장국 못지않은 인기 메뉴가 하나 더 있는데요.

뽀얀 국물의 내장탕입니다. 이 내장탕 또한

소에 들어있는 온갖 내장으로 국물을 내고

먹기 좋게 썰어 뚝배기에 듬뿍 넣어 주는데-

제 입맛에는 해장국도 맛있지만 이 내장탕이 더 끝내주더군요.

고소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거구나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맛이었습니다.

시골 국도에 예쁘게 자리 잡은 곳, 이 집 음식은 나그네 발걸음도 멈추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집은 사실 계획에 없던 곳입니다.

평창을 내려오니 아차 싶더군요. 내가 왜 이 식당을 깜빡했을까...

부랴부랴 제작진에게 식당을 알려줬습니다.

5-6년 전 방문했던 메밀 막국수 집인데

이 집을 빼곤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겠더군요.

영업시간이 지나 늦은 밤에 찾아갔는데도 주인장 내외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이곳은 공이 단위로 시킬 수 있는데요. 공이란 면을 뽑을 때

구멍에 넣는 메밀 반죽 한 덩어리를 공이라고 합니다.

개인차는 있지만 보통 한 공이를 뽑으면 최소 6인분 정도는 된다더군요.

이곳 메밀 막국수는 상차림이 독특합니다.

달걀지단, 채썬 양배추, 갓김치 등 갖가지 고명이 딸려 나오고

면은 공이로 시킨 양만큼 채반에 나오지요.

이집의 맛 포인트는 조선간장으로 만든 양념장 이게 요물입니다.

메밀 면 한 덩이에 조선간장 양념장, 참기름 한 두 방울 넣어먹으니

변함없는 주인장 내외의 손맛에 저도 딸아이도 감동했습니다.

역시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간장 양념장 맛이 밋밋하다 싶을 때쯤

딸이 비빔 막국수를 제조합니다. 각종 채소와 과일을 갈아 만든 양념 고추장이

매콤달콤하니 괜찮다더군요.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워냈는데-

역시 고집 피우길 잘했습니다.

메밀 막국수의 새로운 경지를 다시 한 번 느끼고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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