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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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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四庫全書에 고대사의 진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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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윤복현 조회수 640


한민족 일원으로 중국지배한 청나라 四庫全書에 고대사의 진실이 담겨 있다!


한민족 고대사와 고구려에 관심가지게 됐다는 도올 김용옥의 연구자료로 추천

 



 

여신(마고).상투.석관(피라미드).햇살토기.봉황토템으로 상징되는 산문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한민족은 동북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와 아메리카 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산해경] 등 고대 중국 문헌에서 기록한 조선은 주로 요서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 지역에 속하는 단군한국의 서토인 번조선이다.











한민족의 일부는 요령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내려와 산동반도로 진출하였다. 즉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한민족은 회하 유역과 산동반도에 걸치는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였는데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배달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졌다.

 

단군한국은 한민족문화권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황하 유역의 동이는 은나라를 세워 중국 고대문명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 문화가 대부분 주나라를 비롯한 한족에 의해 계승되어 하화문명으로 꽃피게 되었다.

 

 

 

동이는 오랑캐란 뜻이 아니다. 이는 후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높이고 주변을 낮추기위해 만들어 놓은 개념일 뿐이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동이를 오랑캐로 생각한것이 아니라 뛰어난 문명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동東이란 글자는태양이 떠오르는 광명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동방은 생명·탄생·시작을 의미한다. 광명사상은 동방 한민족 사상의 원형이며, 동방의 뿌리시대에 건립된 국가도 광명사상을 배경으로 하였다.


중국 후한 때의 경학자요 문자학자인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 최초의 종합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夷 자에대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이’는 ‘큰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夷’ 자는 또한 ‘신을 대신하는 사람’과 ‘어진 사람’을 뜻한다.


은나라 갑골문에서 이夷는 시尸, 인人과 똑같이 ‘사람이 똑바로 서있는 모습’으로그려져 있는데, 시尸는 제사 때 신이 응감하도록 세워놓은 신상으로 ‘신의 대리인’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夷’ 자를 ‘신의 대리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 것은 당시 동이족이 신성한 종족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이夷’ 자를 어진 사람으로 해석한 것은 “이夷는 뿌리이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여”라고 한 『후한서』「동이열전」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2중국인의 눈에 비춰진 동이족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사는 어진 민족이었다.

 

 

중국의 『사서석지四書釋地』라는 책에는“3대 이후에는 화華와 이夷가 정해진 구분이 있지만 삼대 이상에는 화와 이가 정해진 구분이 없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3대는 하·은·주 시대를 말한다. 즉 중화와 동이를 구분하여 존화양이를 내세운 것은 후기의 일이며 본래는 중국에 화와 이의 구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서주西周 세력이 이족을 몰아내고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화이개념을 만들어내 춘추시대 공자에 의해 그것이 본격화 된 것이며 본래는 고정된 화나 고정된 이가 따로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이’가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된 것은 중국의 의도적인 공작임을 알 수 있다.

 

동이는 원래 국한된 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는데 나중에 화하華夏족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東夷, 서방에 사는 이夷를 서융西戎,남방에 사는 이夷를 남만南蠻, 북방에 사는 이夷를 북적北狄이라 폄하하여 부르게 되었다.

 

특히 한무제 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를 저술 하면서 동이족 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동이의 진면목을 찾아내어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역시 동이에 속해 있는 만주족의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중국을 통치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데다가 한민족의 일원인 만주족이 다스리는 국가이다 보니 중국인의 해묵은 동이관에 대해 각종 문헌을 통해 객관적 입장에서 면밀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청나라는 스스로를 동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주장하였다. 청나라는 한족의 거센 반청사상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대규모의 국가적 편찬사업을 추진, 완성하였다

중원 대륙을 뒤흔든 동이족 영웅, 서언왕徐偃王

서徐나라 언왕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36국의조공을 받는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고 주나라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은 동이족의 대영웅이었다. 지금은 역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만,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는 우리 상고사의 잊힌 영웅 서언왕과 서이徐夷에 대해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가 왕호를 일컫고 구이九夷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치도록 했다”라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단군조선이다. BCE 1263년 23세 아홀 단제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만주의 영고盈古씨를 서徐 땅에 임명한 것이 서국의 기원이다. 『박물지』는 서언왕의 출생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주워서 따뜻하게 감싸 주었더니 아이가 나왔는데 이름을 언偃이라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 리에 서산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 사이를 드나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에 보이는 언왕의 탄생설화는 한민족 고유의 설화 유형인 난생설화이다. 이 난생설화는 동명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난생설화는 중원을 뒤흔든 서이, 회이가 단군한국계라는 것을 뒷받침하며, 선진시대의 동이와 단군한국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주 목왕 말년에서군徐君 언이 덕이 있어 인의를 좋아하여 그에게 귀속한 동이 나라가 40여 국이나 되었는데,주 목왕이 서쪽으로 순행하다가 서군의 위덕威德이 날로 멀리 미친다는 소문을 듣고 몰래 초나라 군대를 파견하여 불시에 습격하여 대파시키고 서언왕을 살해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덕을 높이고 인의를 숭상한 것은 서주가 아니라 동이였다. 그럼에도 공자가 존주尊周의 대의를 내세우며 『춘추』를 통해 존화양이를 외친 것은 분명 동양 역사 왜곡의 시작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덕망 있는 서언왕이 중원 재패를 눈앞에 두고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에, 구이의 공격에 직면하여 망국 일보직전에 있었던 주나라가 사직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목왕이 구이를 거느리고 서이를 쳐서 주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서언왕이 나라를 일으킨 것은 구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목왕이 서이를 친 것은 구이이니, 구이가 구이에게 대항할 수 있으며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서언왕은 그래서 대항해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당시 주나라는 이미 단군조선에 방물을 바치며 상국으로 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서언왕은 단군천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주나라를 공격했다. 처음에는 구이가 모두 서언왕을 중심으로 주나라에 대항했는데 주 목왕이 천리마를 몰아 황급히 단군의 증표를 가져와서 보여주자 구이가 도리어 주나라 편을 들게 되었고, 서언왕은 차마 동족끼리 싸울 수 없어서 전쟁을 포기했던 것이다.


결국 구이의 공격에 직면하여 망국 일보직전에 처했던 주나라가 사직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단군천황이 전쟁을 만류했기 때문이다. 주 목왕은 구이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었다.


중국 산동반도 남쪽에서 양자강 북쪽에 이르는 지역은 서이와 회이가 살았고 따라서 주나라가 제후를 파견하여 봉한 적이 없었다. 춘추 시대 말까지 항쟁하던 회이와 서이는 결국 전국 시대에 초나라에 흡수되고 만다.

이 ‘사고전서’의 동이 기사를 보면 중국의 동이관에는 대내용 동이 문헌과 대외용 동이 문헌이 있으며 이에 따라 두 종류의 동이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고전서’의 동이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친화적 대외용 동이관이 있었는데도 배타적인 대내용 동이관이 현재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다.

 

그렇게 된데에는 우리 선인들이 동이관에 이중성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공자의 춘추관, 즉 배타적인 동이관에 안주하여 ‘소중화의식’에 사로잡힌 데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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