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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은 고구려 소리만 들어도 기가 꺽이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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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7윤복현 조회수 686


중공은 고구려 소리만 들어도 기가 꺽이는 나라다


아직도 소중화 취급하는 중공에 쫄지 말고 정부차원에서


대작으로 중원과 초원을 휩쓸고 다닌 고구려 광개토태왕을


반드시 영화로 제작하여 한류영화로 세계에 알리기 바란다!


광개토태왕비에 충실해도 사료에 충실한 영화가 된다


문제는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해석문제인데, 예컨대


광개토태왕은 엄연히 정계 기마군으로 티벳지역의


토욕(모용선비 나라)까지 정벌했다고 광개토태왕비문은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찌든


매국매족적 사학자들이 우리 광개토태왕의 스케일을


너무 좁게 보고 해석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동방의인은 집안의 호태왕 무덤이 가묘이고


호태왕은 일찍 죽지 않고 아들 장수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기마군을 이끌고 서진하여 로마까지


진격하여 권력을 행사하며 부패한 로마교황의


굴복을 받아낸 아틸라로 출현했음을 증명했는데 말이다!


우리 광개토태왕께서는 그렇게 스케일이 장대하고


대제사장으로서 공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였던 것이다


또한


수 1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 을지문덕을 영화해해도 좋다!


대한민국을 우습게 아는 중공의 기운을 꺾어 놓는 수단으로써는


사료에 의거한 역사적 사실만큼 좋은 소재가 없는 것이다!



청 태조 누루하치


청 초기에는 조선이 모국이라며 제후가 되기를 청했던

 청 제국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달라진다.

이와 관련해 이것이

‘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으라’는 의미라는 주장도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청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고구려 태왕들에게 제사지낸



고구려 후예(여진)의 나라 청



청나라 신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진족을 결집시켜


금(김)나라 세운



신라왕족 김행(아골타)

청나라 신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청나라의 전신인 금(김) 황실의 족보사인

『금사金史』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얘기는 확 달라진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라고 한다
. 고려에서 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金之始祖諱函普(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청 제국 때의 전적典籍인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더욱 눈에 두드러지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많은 사서들은 금나라의〕 선조가 신라에서 왔다고 적고 있다.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그래서 사서들에서는 두 나라의 이름을 구별하지 않고 썼다. 신라의 왕은 김씨 성을 썼다.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금나라, 나아가 청 제국의 시조가 고려라고도 불렸던 신라 왕족 출신이라는 얘기이다. 한편 부안 김씨 족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100년전까지 지나땅을


최고로 확장시킨 고구려 후예로


만주 한민족 청을 중원에서


내쫓고 세워진 중공이


동북공정으로 한민족에 대한


역사문명 열등감을 벗어


나고자 안달하지만,


홍산문명이라는 것이


상투를 쓰고 빛살토기와


옥을 사용한 한민족의 문명이


명백한 이상 중공의 문명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지나 수.당 1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 소리만 들어도


기운이 꺾이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제가


고구려다! 고구려 국호를


대한민국이 사용하는 한


동아시아 공동체로써의


단군한국의 황통과 혈통을


100% 이어 받아 단군한국을


회복했던 고구려는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나라인 것이다!

삼족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국제적 국호가 고구려이고 대륙시대를 열겠다면

추모태왕 동상 정도는 광화문에 세워야 하지 않는가?

삼족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흉노의 옛땅을 차지한 고구려의 옛영토를 찾아서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일어 났는데, 한나라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이래로 호령(號令)이 중간에 쇠약해졌으며, 다시 왕망(王莽) 때 경시(更始)의 난리를 겪어서 고구려가 그 강역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은 바로 부여(夫餘)인데, 부여는 유리왕(琉璃王)에게 격파되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匈奴)인데, 흉노는 다섯 선우(單于)와 남북(南北) 선우의 난리를 겪으면서 도망쳐 숨어 그 지역이 또 비었다. 이에 고구려가 그 틈을 타고서 남쪽으로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토지가 날로 넓어졌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절을 보내 고구려태왕을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한 것이 이해가 될것이다

 

[문헌비고]는 우리나라의 고대기록을 모아서 정리한 책인데 이 책은 지금은 사라진 고대의 우리책들을 보고 쓴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분명히 흉노의 땅을 고구려가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돈황석굴 수렵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돈황 고구려성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실제로 흉노가 살았던 몽골 땅에서 최근 고구려성이 발견되었다. 또한 위구르 지역에서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 나오고 돈황의 성벽은 고구려성벽을 닮았다고 한다. 수나라때 동서 6천리라고 된기록은 고구려가 전성기가 아닌 말기였으니 당연히 전성기에는 서역까지 진격했을 것이다. 이후 돌궐제국과 전쟁을 하여 대흥안령까지 밀렸다가 다시 회복하여 6천리 즉 몽골중앙부까지만 차지했을 것이다. 

 

"건무(建武) 연간에는 고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노략질하였는데, 우북평은 바로 순천부(順天府)이고, 어양은 우북평의 서쪽에 있고, 상곡은 또 어양의 서쪽에 있고, 태원은 또 상곡의 서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으로, 흉노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고구려가 이곳을 침략하면서 사군(四郡)의 지역을 경유하였는바,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점차 서쪽으로 뻗어서 사군의 경계와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호(胡)라고 칭하나 지역은 실로 북쪽과 가까우며, 지금의 압록강 동쪽 연안과 처음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뒤에 비록 동쪽에서 군사를 써서 살수(薩水)를 경계로 하였으나, 그 지역은 역시 고구려의 변경 지역에 불과하였다."(문헌비고 중에서)

 

송나라때 제작된 화이도와 거란지리도에는 북평은 현재의 베이징이 아닌  태원 바로 동쪽으로 나온다. 즉 고구려가 침공한 북평이 바로 태원 바로 옆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을 차례로 함락하며 서쪽으로 진격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군이 바로 북평의 동쪽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보면 4군은 베이징 서남부 지역이다. 즉 한사군은 베이징에서 태원근처의 공간이고 고구려가 사군을 함락시키면서 태원까지 서진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절을 보내 고구려태왕을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한 것이 이해가 될것이다. 고구려가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패배하기 전 이미 고구려는 태원에서 베이징 남부까지 서북으로 현재 몽골땅 전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위나라에 패하고 선비족이 득세하여 고구려에서 분리된후 고구려가 위기를 겪지만 광개토호태왕때 모두 다시 정복하고 만다.

 

삼족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일어났는데, 한나라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이래로 호령(號令)이 중간에 쇠약해졌으며, 다시 왕망(王莽) 때 경시(更始)의 난리를 겪어서 고구려가 그 강역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은 바로 부여(夫餘)인데, 부여는 유리왕(琉璃王)에게 격파되어 스스로 떨쳐 일어 나지 못하였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匈奴)인데, 흉노는 다섯 선우(單于)와 남북(南北) 선우의 난리를 겪으면서 도망쳐 숨어 그 지역이 또 비었다. 이에 고구려가 그 틈을 타고서 남쪽으로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토지가 날로 넓어졌다."

 

이것은 전성기 때 기록이다. 흉노의 옛 땅을 찾아 보자

 

 


東至室韋,西至金山,南至突厥,北臨瀚海,即古匈奴之故地

구당서/동으로 실위 서로는 금산, 남으로 돌궐, 북으로 한해(바이칼호) 옛 흉노의 땅이다.

 

 

 

 

 

흉노의 옛땅은 위와 같다.

 

 

 

결국 돌궐이 일어나기전 고구려 광개토태왕때 흉노의 옛땅을 모조리 장악하고 하북 서부와 산서성을 장악하고 한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명실공히 만리국가였던 것이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는 광개토태왕 때의 서쪽 영토에 대해"평량까지 평정하니 해동(고구려)의 극성기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량이 어디인가? 바로 흉노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 감숙성 지역이다.


광개토태왕 때 영토가 그렇게 광대해야만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석 비문을 세우고, 세계 최대 규모의 수묘인 300명으로 무덤을 지키게 한 배경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세계 최강의 무적 기마국가였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집안의 호태왕 무덤은 가묘이고, 초원으로 이주시킨 54만 중에 지원군으로 편성된 기마군을 이끌고 서진하여 로마까지 진격해 들어가 신을 팔아 권력을 잡고 부패한 로마교황의 굴복을 받으니 유럽사에서 아틸라로 기록된 광개토태왕인 것이다. 아틸라 투구는 고구려 투구이고, 아틸라의 장례는 고구려 장례식이였다. 아틸라 사후 고구려족이 세운 나라가 한민족 고구려니 한-고리(고구려), 즉 헝-가리인 것이다.


훈은 환.한이다. 훈족이란 초원에서 분열하여 사라진 흉노가 아니라, 광개토태왕의 정예 기마군이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족인데, 유럽에서는 한민족의 정통국호인 환.한을 앞세우고 뒤에 고구려를 붙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백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를 토대로 고구려 태왕과 왕비를 재현한 그림이다.
고구려 태왕이 쓰고 있는 모자는 하얀색 백라관으로 평소에 착용 하는 관모이다.
코리(고리=고구려)족 칸 출신의 태무진과 쿠빌라이도 고구려 태왕들이 쓴 백라관을 쓰고 있다.
이는 고구려왕족 후손인 징기스한이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단군왕검=>부소=>고등=>색불루 단제=>해모수=>고추모=>3대 고구려 태왕 대무진(고무휼)

=>대중상=>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징기스한 태무진(고구려 3대 태왕 대무진 시호)


 [구당서] 열전 고구려조에 보면
오직 왕만이 다섯가지 색에 백라관(白羅冠)을 쓰는데 흰 가죽(白皮)의 작은 띠를 두르며
그 관과 띠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관직이 높은 사람은 곧 청라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비라관(緋羅冠;붉은비단관)을 쓰고 두 개의 새 깃과 금은을 꽂아 장식한다”고 하였다.
안악3호분의 묘주인은 머리에 백색관을 쓰고 있는데 그 안은 흑색 책으로 머리를 묶었다. 
쿠빌라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얀 백라관은 대제사장 겸 통치자인 단군 대통령을 의미한다
고구려 태왕들과 징기스한은 대제사장 겸 대통령이였던 단군왕검의 피가 흐르는 황금족이다
고구려와 몽골은 모두 9환족(9려=환인씨 아홉형제 민족=구려=고려=고구려)이 살았던
유라시아 12환국 공동체을 다시 회복하는 다물전쟁을 치뤘다고 봐야 맞다.
무지바한 살상이 아니라, 다물에 참여하는 나라와 민족은 살려 주는 반면에
저항하는 나라와 민족은 궤멸시키는 군사전략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몽골제국의 대칸-쿠빌라이
쿠빌라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쿠빌라이의 지나원정
쿠빌라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원을 중심으로 4개의 한국
쿠빌라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라시아 대제국 건설에 사용된 고구려 과하마(하루 500키로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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