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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기의 시사Q - 시청소감

윤슬기의 시사Q - 시청소감
확실히 때려 잡자!김정은! 완전히 때려 잡자!종북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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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윤복현 조회수 587

6.25때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하여 김일성을 참수하고자 했던 3사단 백골부대 경례가 '백골!'이다! 동방의인이 백골사단본부 땅굴탐지부대 출신이다. 이번 작전명은 땅 속 깊숙이 숨어 지내는 두더지(종북간첩) 잡기다! 군통수권자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골사단 지휘관 출신들을 국방장관.국정원장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한 이유다. 김일성의 오줌을 지리게 만든 가장 용맹한 부대가 백골부대이기 때문이다. 북괴군 가슴팍에 총칼을!이 백골부대 표어다!


미친 개들은 몽둥이가 최고다!



확실히 때려 잡자!김정은! 완전히 때려 잡자!종북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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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도발에 맹공 퍼부은 박정인 장군 해임사건"



북한의 지뢰 공격 소식을 듣고 북이 우리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도 죽여보고, 땅에서도 죽여보고, 어뢰도 쏴보고, 대포도 쏴보고, 지뢰도 터뜨려보고…. 다음엔 또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로 우리 국민을 살상할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이 지경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북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포'는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데 우리는 그 수단을 잃어버렸다. 그 시초는 우리 정부가 1973년 박정인(朴定仁·87) 백골사단장(육군 3사단장)을 해임·예편시킨 것이라고 본다. 박 사단장 회고록에 따르면 3사단은 그해 3월 7일 비무장지대 내 표지판 보수 작업을 실시했다. 매년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는 우리 장병을 향해 북이 기습 사격을 가해 왔다.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박 사단장은 마이크로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구했다. "차후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민군 측에 있다"고 몇 차례 경고했다. 북이 경고를 무시하자 박 사단장은 관측기를 상공에 띄운 다음 북측 GP(초소)에 포 사격을 개시했다(박 사단장은 연대장 시절 군사분계선 남쪽을 제 집처럼 넘나드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5명을 쓰러뜨린 다음 붙잡아 온 사람이다. 그 중 둘은 죽었다). 포탄이 북 GP를 그대로 강타했다. 이어 북한군 보병들 배치 지역에도 포탄을 쏟아부었다. 부상 장병을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도 발사했다. 이 연막탄으로 일대에 불이 붙자 지뢰들이 연이어 폭발했다. 북한군이 달아나는 것이 목격됐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 사단장은 그날 밤 사단 내 모든 트럭에 라이트를 켜라고 명령했다. 그 상태로 한꺼번에 DMZ 남방한계선까지 돌진케 했고 일부 차량은 군사분계선까지 밀고 갔다. 나중에 박 사단장은 "김일성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북에서 난리가 나고 김일성은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분명 떨었을 것이다.


1972년 이후 남북협상을 진행 중이던 정부는 한 달도 되지 않은 1973년 4월 3일 박 사단장을 해임했다. 군복까지 벗겼다. 미군의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북은 도발하면 훈장을 주고, 우리는 반격하면 벌을 준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경우였다. 박 사단장은 회고글에서 "나는 나의 판단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 군인의 무모함이 나라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군인에게 용맹이 덕목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용맹하지 못하면 절대 군인일 수 없다. 민간 정부의 통제를 받되 군은 용맹해야만 적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 온화한 신사가 집에 호랑이를 키우는 것이 정부와 군의 관계다. 박 사단장 해임·예편은 우리 군인들에게서 그와 같은 용맹을 빼앗아가 버렸다. '용맹하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군인들 머릿속에 들어박혔다.


월남(越南)한 청년들이 주축이 된 연대 하나가 "백골이 돼서도 통일을 이루겠다"고 맹세한 데서 백골사단의 이름이 유래했다. 그 사단의 진정한 부대장은 박정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백골사단에 취임한 날 '전 장병 철모 착용'을 명령 1호로 하달했다. 연이은 2호 명령은 '총기 거치대 자물쇠 제거와 실탄 장전'이었다. "백골!" 경례 구호도 부활시켰다. 끔찍해서 안전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고 없앤 구호였다. 총검술 훈련도 남쪽 방향이 아닌 북쪽으로 하게 했다. 심지어 야외 화장실조차 북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박 사단장은 '모든 일을 전투 기준으로'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과 민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백골용사 선서문을 만들어 복창케 했다. 사단장에서 해임됐을 때 이임사는 "북진통일을 완수하지 못해 유감이다"는 것이었다.


육사 출신인 박 사단장은 아들도 육사에 보냈다. 그 아들이 첫 방학 때 찾아오자 "내가 북진하다 전사하면 네가 백두산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손자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에게 "백골!" 구호로 경례하게 했다. 그 손자가 또 육사에 들어갔다.


이런 무장(武將)은 진급이 뒤처지다 결국 별 한 개를 달고 물러나야 했고, 전투가 아닌 사고 방지와 진급이 목적인 군인들은 출세해 온 것이 지금 우리 군의 실정이다. 북·중·일 누가 두려워하겠나. 장비가 낡고 연료도 없는 북은 전면전은 불가능하다. 핵은 쓸 수 없는 무기다. 결국 천안함 폭침이나 지뢰 도발처럼 등 뒤에서 찌르는 짓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세력일수록 '공포'가 특효약이다. 그런데 우리는 얌전한 신사가 집에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키우는 꼴이다. 과거 남북회담 때 북측 사람들은 박 사단장의 근황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를 두려워하고 의식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군인이 몇이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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