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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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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한반도까지 무궁화 심고 온 단지파 이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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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윤*현 조회수 2256




 기독교인들은 맨붕에 빠질수도 있겠지만


기독경에 봉인되어 감추어진 단지파의 이주와


실체를 때가 되어 공개해야 하는 하늘역사를


이해야 할 것이다! 유다로 상징되는 유대민족이


오늘날 세계 물질문명을 지배하고 있는데 반해


한류로 상징되는 정신문명은 단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이 지배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한계는


양극화와 부패와 탐욕으로 그 임계점에 와 있고


오로지 한민족의 경천애인 문명만이 물질문명의


인류를 치유하고 구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이 택한 진정한 원이스라엘 민족은


단지파가 이주하여 정착한 한반도 한민족임을


세계에 공개하면서 가나안 정복전쟁 당시 선두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운 단지파의 강인한 전사정신으로


양극화와 부패와 탐욕이라는 물질문명으로


죽어가는 인류를 단지파 한민족이 다시


살리고자함이다! 참고로 강인한 전사집단인


고구려인들의 피 속에도 흐르고 있고, 이샤야서에


이미 예시된 동방의인도 단지파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동방의인(윤)



단지파 와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시 선조의 땅 한반도까지 이주해온 배달족 소호씨 후손-이스라엘 단지파


한민족 소호씨(슈메르=이스라엘민족의 선조)의 이주로:한반도 압록강 지역=>요서.산동


=>중앙아=>중동=>이집트=>중동=>중앙아=>몽골=>만주=>한반도 / 연어처럼 돌아 오다







북한 평양 대동강변에서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고대 이스라엘의 기와장이 출토됨으로써 증명되는 바는


오리지날 황인종 이스라엘민족은 한반도의 한민족이다


중동 이스라엘민족은 풍습은 한민족과 동일할지 몰라도


혈통상으로는 주변 외세 침략으로 인한 혼혈민족이 됐다!



[자료]중동에서 한반도까지 무궁화 심고 온 단지파 이주 비밀





단지파의 행방을 감추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신이 이삭에게 옮겨지고 이삭 속에 거하시던 하나님의 신이 야곱에게 옮겨졌는데, 이는 성령으로 따라 난 자에게 장자상속을 할 때에 이루어졌던 신(神)의 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야곱에 거하실 때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의 손자들이 모두 이스라엘이라고 지칭할 수 있었지만, 야곱의 하나님의 신이 야곱의 다섯번째 아들 단에게 옮겨진 이후부터는 오직 단지파 백성들만이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저 하늘의 별만큼 네 자손들도 이 땅 위에 가득히 넘쳐 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고 또 야곱에게도 "내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단(이스라엘의 장자)의 씨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파의 행방을 감추는 동시에 단지파의 이동 중에 단의 씨를 지구촌 전역에 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파 와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단지파 와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 무너진 다곤신전으로 가다
 
눈먼 삼손에게 기둥 두 개의 위치를 알려줬던 소년은 사당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그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머슴살이하던 포도원으로 달려가서 그의 누나를 찾았습니다. 이들 남매는 포도원에서 빠져나와 마하네단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을 종으로 부리던 포도원의 주인은 다곤신전에 산제물로 바쳐지는 삼손을 구경하러 갔다가 거기서 비명횡사하였던 것입니다.

마하네단으로 올라온 소년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들 앞에서 가사 성읍에서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했습니다. 삼손의 죽음을 전하는 소년의 말을 믿는 족장들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족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레위인은 “아마 블레셋의 포로생활 6개월 동안 삼손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 힘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가 사당의 기둥을 뽑아버릴 수 있었을 것이오.” 하고 아는 척하였습니다.

그때 삼손과 같은 단지파에 속한 어떤 사람이, “삼손의 시신을 거두어 그의 고향 소라에 장사지내도록 합시다!” 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제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파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총사령관 삼손이 적군에 잡혀가자, 우리 이스라엘은 감히 블레셋을 대적하여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직 방어태세만 취해 왔는데, 어떻게 지금 적진에 있는 삼손의 시신을 찾아올 수 있겠소?” 하고 만류하였습니다.

한편 에브라임지파와 유다지파에 속한 족장들은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죽었다면 이제 이곳 마하네단도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처지에 있는 위험한 지역일 수밖에 없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하네단의 성소에 모셔져 있는 하나님의 궤부터 안전한 지역으로 먼저 옮겨놓아야 할 것이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다곤 신이 삼손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이제 그들은 지난번처럼 여호와의 궤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소. 그러면 그들이 또 다시 우리 이스라엘을 쳐서 법궤를 탈취한다면, 그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대할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위 사람들은 “법궤를 비밀리에 모처로 옮기는 것은 사무엘에게 맡깁시다. 그리고 사사 삼손의 부재로 이스라엘을 영도(領導)할 지도자가 없으니, 당분간 사사직도 그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합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각 족장들은 레위 사람들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각지파의 족장들은 삼손의 시신에 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단지파 사람들은 다른 지파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삼손의 시신을 수거할 목적으로 블레셋의 가사 성읍으로 삼손의 형제들과 그의 집안사람들로 꾸러진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다곤신전의 붕괴로 다수의 블레셋 지도자를 잃은 블레셋 사람들은 단지파의 사절단을 냉대하고 거절할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진 다곤신전에 몰려와 그들의 고관들과 군대장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건물 잔해를 치우는데 한창이었습니다. 단지파의 사절단으로 가사 성읍을 방문한 삼손의 일가친척들도 삼손의 시신을 수습하여 소라 성읍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들은 삼손을 누하 동굴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 옆에 나란히 눕혔습니다.
 
사사기 16장 31절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2) 단지파의 백성들이 소라를 떠나다
 
삼손 장수가 사당의 기둥을 뽑아 버림으로 그곳에 모인 블레셋 고관들과 함께 압사(壓死)를 당하게 되니, 블레셋 민족과 단민족 쌍방이 전의(戰意)를 잃어 더 이상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장사지내기 위해 소라 성읍으로 모여든 단지파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소라에서 단지파의 백성들을 이끌고 헐몬산의 남쪽기슭에 있는 단 성읍으로 올라가라. 나 여호와가 단 성읍의 제사장 요나단 네티바에게 단지파 백성들이 행할 길을 지시하리니. 너희 족장들은 요나단 네티바의 말에 순종하라. 요나단 네티바는 모세의 손자 요나단의 후손이니라.”

단민족은 BC1200년경 이래로 약 200년간 블레셋과 기나긴 전쟁을 벌여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BC1400년경 여호수아와 갈렙을 앞세워 가나안에 입성한 지 약 350년 만에, 단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3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이 소라를 떠나 가나안 최북단(最北端)의 단 성읍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25년 전에 5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이 라이스를 점령하여 조상의 이름을 따서 단(Dan)이라고 지명을 개명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단 성읍은 블레셋 사람들과 늘 전쟁을 치러왔던 소라 성읍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였습니다. 거기에 마르지 않는 샘물과 풍부한 과일이 있었으며, 특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소는 돌을 네모반듯하게 깎아 축조된 것이었습니다. 또 흙벽돌을 쌓아 지은 집에서 단지파 백성들은 거주하였습니다. 흙벽돌은 황토에 짚을 썰어 넣어 잘 개어준 다음 나무틀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흙벽돌의 제조기술은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에 익힌 것이었습니다.
BC1055년 말경에 소라 성읍을 떠난 3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이 단 성읍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단지파의 제사장 요나단 네티바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제사장 요나단 네티바는 단지파의 족장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나 여호와가 단지파 백성들을 이끌리라. 소라에서 올라온 3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과 단 성읍에 거하는 5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은 모두 이삿짐을 꾸리고 떠날 채비를 하라. 아이 밴 여자들과 그의 남편, 젖 먹이는 여자들과 그의 남편들은 단 성읍에 머물 것이며 또한 이들은 단 성읍을 떠날 수 없는 노약자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돌볼 것이니라. 떠날 자는 5만 명이면 족하되, 삼일 후 그믐날 초저녁에 출발하리라.”

요나단 네티바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단지파의 족장들을 모으고 “각 족장들은 자신에게 속한 친척들을 이끌고 단 성읍에서 이주할 준비를 속히 하십시오. 삼일 후 초저녁 때 떠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단지파의 앞길을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족장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요나단 네티바의 말을 경청한 후, 각자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단지파의 족장들은 똑같은 꿈을 동시에 꾸었습니다. 그들의 꿈은 이러하였습니다. 5만 명에 가까운 단민족이 가나안을 떠나 멀리 사라진 후에, 가나안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동족 유대인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이방나라 곳곳으로 흩어져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중권세 잡은 마귀신의 조종을 받던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종시키려고 하는 일이 발생하자, 본래 키가 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키가 큰 이방인과 결혼하여 키 큰 2세, 즉 튀기를 낳아서라도 종족을 보존하는 꿈도 연이어 꾸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단지파 족장들은 자신들이 꾼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꾼 꿈을 아무에게나 발설하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의 음성에, 족장들은 또 한 번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또 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두 족속 가운데 단 족속을 뽑아 선민 중에 선민으로 보전(保全)하려고 하시는 구나!’ 하고 가나안을 떠날 채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3) 단 성읍을 떠나는 단지파 백성들
 
하나님께서 정한 그믐날이 돌아오자, 5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은 단 성읍에서 출발하여 정처 없는 나그네 길에 올랐습니다. 달 없는 그믐밤은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길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행군을 시작하자마자 행진하는 백성들의 머리 위에 여호와의 성스러운 구름이 빛을 발하며 주위를 환하게 하였습니다. 행군하던 그들은 동(東)으로 가는지 서(西)로 가는지 방향을 알려고 고개를 쳐들어 하늘의 별들을 보고자 하였지만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머리 위에는 여호와의 성스러운 기운을 띤 구름이 언제나 낮게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파의 백성들을 단 성읍에서 동북쪽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단민족이 BC1055년 말경에 ‘단’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시리아를 지날 때, 다메섹(現 Damascus; 다마스쿠스)와 다드몰(現 Palmyra; 팔미라)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보름 정도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다메섹에는 아마나 강(現 Ri. Barada; 바라다 강)의 물이 흘러들어와 조성된 구타(Ghouta) 오아시스가 있었으며, 다드몰에는 대추야자로 우거진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시리아 전역에 무궁화(샤론의 장미)가 만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파 백성의 족장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각 족장들은 이동 중인 수레 위에 네모난 나무상자를 만들어 고정시켜라. 그 상자 속에 흙으로 채우고 아람의 들에 핀 무궁화를 옮겨 심을 것이니라. 상자 밑을 뚫어 배수가 용이하게 하되 해마다 무궁화 나뭇가지를 꺾어 흙 속에 따로 묻어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하여 세세토록 보전할 것이니, 이는 끊임없이 피는 무궁화가 끈질긴 단민족의 상징이기에 그러할지니라.”

단민족이 아람1을 떠난 지 이삼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곳 전역에 큰 가뭄이 들어 무궁화나무가 거의 멸종하여 희귀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람의 무궁화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選民) 단지파가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 의해 추적당하지 않도록 사전에 무궁화의 전파경로를 차단하실 목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람 지역을 통과한 단민족은 BC1054년에 이라크의 니느웨2와 아르벨라(Arbela)에 도달하여 거기서 천막을 치고 얼마 동안 여독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짐을 꾸리고 일어나서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BC1053년에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단지파의 족장들에게 “너희는 돛을 단 배를 만들어 타고 해 뜨는 저편으로 향해 5일간 밤낮으로 노를 저어가며 이 바다를 건너갈 것이니라. 한날한시에 출항할 것이니, 오십 인을 족히 태울 수 있는 배를 건조하되 일천 척으로 하라.” 하고 명하셨습니다.3

5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은 그들 족장들의 통솔을 받으면서 배를 만드는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들의 피 속에는 약 23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욥바에서 해양강국의 지위를 누렸던 조상의 기상이 면면히 유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천 척의 배를 3년 만에 건조할 수 있었습니다.

BC1053년에 단지파 백성들은 나귀 등에 이삿짐을 싣고 또 가축을 이끌고 바쿠 항구에 매여 있는 일천척의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바쿠에 3년 동안 머물면서 뱃속 아이까지 합하여 새로 태어난 아이가 5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 1만5천 명은 승선하지 못하고 바쿠에 남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4만 명에 해당하는 단지파 백성들만 카스피 바다를 건너 지금의 투르크멘바시 항구도시에 도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순풍에 돛을 단 배는 바쿠에서 투르크멘바시까지 5일 거리를 4일 만에 횡단하였습니다. 육지에 다다르자 단지파 백성들은 배 안에 있던 가축들과 더불어 꾸린 짐을 나귀 등에 실은 채 조심스럽게 하선(下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단지파 족장들에게 지시하기를, “너희 백성들이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일천 척의 배에 구멍을 뚫어 하나도 남김없이 수장하라. 이곳 이방인들이 너희가 타고 온 배로 바쿠로 건너가 거기에 남아 있는 일만 오천 명의 단지파 동족들을 해할까 염려함이라.”

단지파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타고 온 모든 배를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하였습니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단민족이 투르크멘바시에서 아쉬가바트(Ashgabat)까지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카라쿰 사막을 지날 때에는 항상 그들 머리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쉬가바트에서 계속 동쪽으로 행군하여 BC1050년에 마리(Mary)에 도달하였습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BC1049)와 타시켄트(BC1048), 카자흐스탄의 침켄트와 알마티(BC1047-1046), 천산북로를 경유하여 알타이산맥 아래에 위치한 중국서북부의 쿠둔(BC1045-1044)과 부얼진(BC1043-850)까지 왔습니다. 단지파 백성들은 수만리나 되는 멀고 먼 길을 행군하는 동안 먹을 것이 없어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물겨운 고난의 길을 걸어 중국까지 왔지만 중국에서는 메마른 황토에서 이는 흙먼지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숲이 우거지고 맑은 강물이 흐르는 알타이산맥에 이르러서야 짐을 내려놓고 충분히 쉴 수 있었습니다.


BC1055년경 가나안 단 성읍에서 동쪽으로 출발할 때 단지파 백성들의 수효가 5만 명에 해당하였지만, 약 12년간에 걸쳐 부얼진 근교의 카나스 호수까지 오던 중 휴식을 취했던 곳곳마다 수백 명의 단지파 백성들이 잔류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였기에, 알타이산맥의 주봉우리인 우의봉(友誼峰)의 주위에 있는 카나스 호수에 도달한 백성들의 수효는 3만 5천 명에 그쳤습니다.


3만 5천 명의 단지파 백성들은 중국북부 알타이산맥에 와서 지친 몸을 풀고 거기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00여 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다.4 토착민과 물물교환을 위해 알타이계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자라나는 이스라엘 단지파 2세들은 히브리 모국어를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배출할 민족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한 위장전술이었습니다. 언어가 완전히 교체된 후, BC 850년 전후에 몽고로 옮겨져 살았는데 이미 알타이산맥 아래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불어난 인구는 150만 명이 족히 넘었습니다.


기원전 9세기 중엽, 단지파 주류의 절반 이상이 되는 80만 명이 중국서북부에서 몽고로 이동할 때에는 카자흐스탄의 세메이(Semey)로 올라가 시베리아알타이산맥의 낮은 지대를 넘어 알타이의 수도 바르나울5을 경유하였습니다. 알타이를 넘은 단지파의 거주공간은 사얀산맥의 남쪽기슭에 위치한 투바(Tuva)6와 바이칼호수 주변의 이르쿠츠크와 울란우데 그리고 몽고평원의 광대한 영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투바에 정착했던 단지파의 후손은 훗날 투르크족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단지파 민족이 끝없이 펼쳐진 몽골초원에서 수십 년간 유목생활을 하면서 자연히 말을 다루는 기마민족으로 격상되었고, 마찬가지로 중국서북부와 시베리아 알타이 그리고 몽골초원에서 청동검과 청동화살촉, 제사장의 청동방울과 청동거울 등을 제작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출발할 당시 가져온 청동기 문화의 꽃을 한껏 피웠습니다. 중국서북부에서 거주할 때에는 유목생활보다 정착민으로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급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흙 이기기와 벽돌 굽던 경험7을 살려 집 지붕에 기와8로 단장하는 창의력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남아에게 할례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방인과 구별한 적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알타이산맥을 넘은 단지파 백성들이 낳는 아이들부터는 남아(男兒) 여아(女兒) 구분하지 아니하고 그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새겨진 채 출생하여 세 살 내지 다섯 살 이내에 사라지게끔 역사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할 때, 야곱의 하나님께서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껍질 벗긴 가지의 그림자로 아롱거리게 하여 그 물을 먹은 양들이 교미하고는 얼룩진 새끼를 낳게 한 역사와 같습니다.


단지파의 부족들은 몽골대초원에서 목초지를 따라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간혹 평원에서 서로 마주칠 때에 동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할례와 같은 증표가 바로 아기들의 몽골반점이었습니다. 갓난아기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전래되어 오는 조상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에 순산을 위해 삼신할머니가 손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떠민 자국’이라는 것입니다.

알타이 산맥을 넘은 단지파의 주류는 투바를 본거지로 삼아 거기서 20년간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소와 양 그리고 염소를 이끌고 신선한 풀을 찾아 바이칼 호수와 몽고 대평원으로 뿔뿔이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절기가 돌아오면 일제히 투바로 귀환하여 모세의 후손 요나단 가문이 주관하는 제사의례에 참여하였습니다.

모국어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알타이어를 사용하던 단지파 백성들이 수십 세대를 거친 후에, 하나님께서 단민족 가운데 구세주를 성공적으로 배출하실 때가 이르면 정작 단민족의 후손들이 그들 자신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행할 인류구원의 역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단지파의 후손이 되는 한민족이 이스라엘민족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남겨놓을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리하여 기와 굽는 기술 전승이 끓어지기 전에 BC 830년경 투바에서 수십만 명의 단지파 주류를 이끌어내어 중국 요녕성을 경유하여 농사가 가능한 만주평원으로 옮기셨습니다. 단민족은 만주에서 30년간 청동기문화(BC830-800)를 일으킨 후에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민 단지파가 하나님이 예비한 금수강산 한반도에 무사히 안착하자, 하나님께서 기념비로 <도착했다>, <성도가 모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된다>, <잠언을 지휘하는 사사가 통치한다>, <신의 나라에 단결하여 들어가자>라는 고대히브리어 글귀를 동그란 기왓장인 수막새9에 양각(陽刻)으로 새겨놓았습니다. 레위지파에서 제사장 신분이 전승되었듯이 천제(天祭)를 맡아온 제사장의 가족들은 대대로 히브리어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경건한 마음을 간직하였기에, 고조선 와당에 고대히브리어를 새겨 인류구원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한편 단지파 이동과정 중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만주에서 정착한 자들 가운데 일부는 보하이 해변을 따라 산둥반도로 이주하여 춘추시대에 제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들을 동이족10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주에서 산동성으로 이주한 동이족은 그들이 백두산을 천제(天祭)를 지내는 신령한 산으로 여겼던 풍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태산(泰山)11에도 천제단을 쌓고 재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원래 단지파가 BC1055년에 동쪽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이스라엘 최북단 헬몬산의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던 신성한 의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단에 남아 있던 3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





BC1055년 말경에 단 성읍에 8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5만 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는 방향도 모른 채 홀연히 떠났습니다. 그러자 단 성읍에 남아 있던 3만 명의 백성들도 앞서 떠난 동족들을 찾아 나서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말씀하기를, “너희는 앞서 떠난 형제를 찾지 말며 기억도 하지 마라. 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땅이 따로 있으니 때가 되면 그리로 인도하리라.”하고 위로하셨습니다.



BC1052년경에 공중권세 잡은 마귀신은 음행의 무기를 써서 이스라엘 12지파를 두 패로 분열시킨 후 동족상잔으로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획책하였습니다.12 이를 내다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동족상잔이 일어나기 직전에, 단성읍에서 머물고 있던 3만 명의 단지파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삼일 후 날이 새는 대로 북으로 이주할 것이니라. 나 여호와가 핫투사(Hattusha)13 성읍을 단지파 기업으로 주노라. 핫투사는 헷족속14이 세운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나니, 이백년 전에 망하여 그들은 갈그미스(Carchemish)로 내려갔느니라.”

3만 명의 백성 중에 5천 명은 단성읍에 그대로 머물었으며 25천 명만 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향하여 북진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메섹을 거쳐 하맛(Hemath)에 이르고 하맛에서 알렙포(Aleppo)까지 행군하였습니다. 단민족은 알렙포에서 다시 출발하여 오늘날 시리아 국경을 넘어 터키의 카흐라만마라슈(Kahramanmaras)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 북진하여 카이세리(Kayseri)를 지나 마침내 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 동쪽 근교에 위치한 핫투사(Hattusha) 성읍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민 단지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 최북단 단성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5천 명의 단지파 백성들은 납달리지파와 혈연관계를 맺고 번성하였습니다. 또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성읍에 정착한 15천 명의 단지파 백성들도 크게 번성하였으며, 이들은 모험심이 매우 강하여 터키의 중부고원을 횡단하여 그리스까지 왕래하는 낙타 대상(隊商)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바쿠 성읍의 단지파 상인들은 터키 중부의 고원지대에 정착하고 있던 단지파 동족을 발견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터키의 단지파 백성들은 바쿠에서 온 동족 상인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가나안의 단 성읍에서 최초로 떠난 5만 명의 동족의 행방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년 전에 수많은 동족이 바쿠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터키의 단지파 족장들은 상인으로 가장한 열댓 명의 장정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으로 이주한 동족의 발자취를 쫓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핫투사(Hattusha) 성읍에서 출발하여 터키의 시바스(Sivas), 에르주룸(Erzurum), 카르스(Kars)를 거쳐 아르메니아의 바나조르(Vanadzor)를 경유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예블라흐(Yevlakh)를 지나 바쿠에 도달하였습니다. 바쿠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 바다를 건너 계속해서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단지파 동족들이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5인의 장정들은 동으로 떠난 동족의 행방을 의외로 쉽게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12개월의 대장정(大長程) 끝에 알타이산맥에 당도한 15인의 장정들은 카나스 호수 주변에서 우거하는 단지파 동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5인의 장정들은 알타이산맥 주변에서 정착한 지 이제 삼사년 째 되는 단지파 족장들에게 단 성읍에서 북진하여 핫투사(Hattusha) 성읍에 거하는 친족들의 근황을 알려주었습니다.



단지파 족장들은 15인의 장정들을 잘 대접하고 떠나보낼 때 마흔 살의 장년 열 명을 뽑아 핫투사로 향한 먼 여행길에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BC1040년경부터 단민족은 터키의 핫투사와 중국북서부 알타이 지역을 왕래하기 시작했고, 훗날 투르크족 또는 돌궐족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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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녁 무신론 권세은 왜 무너지나?평양에 정착한 단지파


단지파 와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시 선조의 땅 한반도까지 이주해온 배달족 소호씨 후손-이스라엘 단지파

우리를 자유케하는건 양심과 진실이다

이스라엘 문자는 배달한국 녹도문자로서

배달한국 말기에 압록강지역에서 서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소호씨(슈메르) 후손으로 조상은 해불함(아브람)

 

 

1. 김규진 (金圭鎭 1868~1933)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書法眞訣,1914년 간) 에 "고조선 신치체"로 기록. 참고로 김규진 선생은 고종의 황실서예스승이오.



2.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 1926 간)』에 "고조선 신치자"로 기록. 해동역대명가필보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역대필적을 엮은 책이오.



3. 평양 법수교비는 1942년 간행 북한 평안도 영변군지(구 영변군지)의 "고조선 신치전" 으로 기록된 것이오.



4. 나머지 중국그림들은 "창힐글자" 혹은 "창힐"과 관련되어 명칭이 기재되어 있소. 앞의 두분들은 저서와 행적에서 보듯, 분명한 분들이고, 그분들이 "창힐고문자" 혹은 "귀갑문"이 아닌 "고조선 신치체"라 기록해 놓았소.

 

 

 

 

 

 

 


 

 


 

고대 히브리 문자가 씌어진 와당(瓦當)과 단군지석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과 광주 박물관에는 아주 희귀한 고조선시대 와당(瓦當)이 소장되어 있다.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것인데 놀랍게도 고대(古代 )히브리 문자가 씌어 있다. 그 내용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으로 ‘잠언을 가르치는 사사가 통치한다.’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라.’ ‘도착했다.’, ‘성도가 모여서 기도함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다’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대략 B.C. 1천년경에 사용했던 것으로 그 당시의 것에서 약간 진보된 것도 있다. 이 문자는 야곱의 12지파만이 사용한 것인데 그 문자의 사용시기가 성경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단지파의 소멸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대동강뿐 아니라 백두산에도 히브리어가 씌어 있다. 일제치하 고정록 선생에 의해 발견된 ‘단군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11년경 일본인들이 백두산에서 벌목하다가 뜻을 알 수 없는 글이 씌어 있는 지석(誌石)을 발견, 의주에 있는 평북 도청에 옮겨 놓았는데, 그 지석에 음각된 글이 한글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어서 아무도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모두들 궁금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당시 의주 천주교당에 와 있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가 그 지석의 글을 판독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 글자는 ‘히브리’ 문자이며 내용은 ‘단군지석’인데 판독해보니 제작연대는 약 3천년 전이라고.

 그런데 비단 이런 유물들 뿐 아니라 아직도 우리말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가 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로 애비, 애미, 애기 등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와 발음뿐 아니라 의미까지 같다.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을 한다든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남아있는 ‘고수레’ 등의 용어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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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이자 인류대제사장이였던 단군왕검 천왕

동상을 부시는 무지한 기독교인들도 인류문명과

연결되는 1만년 우리 한민족사부터 바로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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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제천문명은 모두 한반도 농경

제천문화에서 나온 만주 압록강지역의 제천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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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천년전 지구기온이 높아서 바다물이 들이찼을 때 지형도를 대강 그려본 것. 

흔히 중원이라 불리던 중국의 넓은 평야지대는 지대가 낮아서

특히 대강 [ 5~6천년전]을 중심으로 상당히 오랜기간 물에 잠기는 기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는 당시 고대문명의 계승, 발전이 어려운 점 많았다. 

[고대 한국 제 3차 중심지] 즉 [한반도 북부-만주]는 고대에

[대황(大荒)의 중심(中)] 이라 불린다.


먼저 [대황(大荒)]이란 무슨 뜻인가 보자.

대(大)자는 크다 , 위대하다는 뜻인데

원래 大자는 고대한국인들을 뜻하는 글자.



 고대한국은 대방(大方) <- 관련글

[황(荒)]자의 고대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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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황) - 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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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황) - 전서]

[출처 -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ASP/]

  

물(水)이 흘러나오는 곳에 山이 있다.

여기서 山은 자연산(마운틴)이 아니라 [3개의 중심 피라미드]를 뜻한다.

피라미드 위에서 두팔을 들고 교화하는 지도자의 모습도 보인다.

압록강변의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 <-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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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5 ~ 6 천년전의 문명 전파 중심 위도]

5 ~ 6 천년전에는 지구기온이 최고조에 달했으므로

위 지도의 사각형 부분이 지금의 남한 기온과 비슷했고

고대한국 제3차 중심지로부터 서쪽으로 문명이 전파된다.

- 물론 6천년 이상 전에도 문명은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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