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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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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가 태자를 인질로 보낸 왜는 한반도 호남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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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윤복현 조회수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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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마한의 해국 금동관-지구 모양의 둥근 모양을 상단에 올리고 주변세력이 보호하는 아름다운 궁전(마고성)을 상징하는 모양을 새겼다


관련 이미지옹관묘 분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막강했던 한반도마한의 중심국가-해국=해나라


북방세력에게 종속당하지 않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호남 옹관묘세력은 한반도 마한의 해양세력-해(왜)



한반도 토착세력으로 남한의 종주국


자처하며 고구려와 2차에 걸친 치열한


전쟁 후에 결국 패하고 열도로 이주하여


열도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열도는


원주민 아누족이 훗카이도로 이주하면서


호남세력에 의해서 야요이 문명이 건설됐다


현재 일본은 호남세력에 기반한 백제.신라.가야.


고구려 등 북방세력이 융합된 국가가 된 것이다!


현 일본천황가는 백제왕들에게 제사지내는 백제왕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그간 일본인들이 왜를 일본열도 내로 비정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 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왜는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사료에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료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서기 391년·광개토왕 1년, 백제 진사왕 7년, 신라 내물왕 36년) 기록을 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다를 건너와’(渡海)라는 구절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어떤 탁본들은 ‘渡海’라는 글자를 선명히 보여주지만,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제기 당사자이자 최근 이를 현지 답사한 이진희(李進熙)는 ‘海’(해)자는 ‘皿’의 자획이며 ‘渡’(도)자도 확실치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 내에는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결과다. 그렇다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정치세력인 것이다. 당시 왜가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천황가가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온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마민족이 4세기 초 바다를 건너 북규슈(北九州)에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했다가 4세기 말께는 동북 기나이(畿內) 지방에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는데, 그 주인공인 16대 오우진(應神) 천황은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주장은 4세기 말에 일본열도 내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던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발상을 전환한다면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의 왜로 추정되는 정치세력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神功) 49년(369년)에도 보이는데, 백제 근초고왕과 함께 가야 7국과 마한 잔존세력을 정복한 사건은 한반도 내의 왜가 수행한 군사정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반도 내의 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여 그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고구려와 더 이상 싸울 여력을 잃은 왜의 상당수 세력은 한반도 남부를 포기한 채 일본 규슈 지방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동정(東征) 기사는 이들이 수행한 열도 정복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5세기 이후의 중국 기록들이 이전의 기사와 달리 왜의 중심지를 한반도 남부가 아닌 일본열도로 기록한 것은 이런 변화한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倭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년)까지 대략 5백50여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록이다. 그후 약 1백60여년 동안 왜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 문무왕 5년(665)에야 다시 나타난다.


백제본기에는 왜 관련 기사가 아신왕 6년(397년) 처음 등장해 비유왕 2년(428년)까지 7회에 걸쳐 나온다. 그후 1백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무왕 9년(508년)에 다시 나타나 의자왕 때 두번 보인다. 백제 비유왕 2년(428년)과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이후 왜 관련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사라지는 것은 이 무렵, 즉 5세기 무렵 왜의 주도세력이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들어간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성과가 이미 수차례의 전남지역 고분군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와같은 성과에 따라 고고학계는 역사학계와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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