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히지 않고 한없이 날고자 했던 고구려인들
개방성 진취성 공존성이
고구려의 혼이다
김일성 일가 우상화 신격화로
인권을 말살당하며 세뇌당하고
억압당하여 노예로 살고 있는
북 국민에게도 자유를 만끽하는
해방을 선물해야 한다
자유하라 나누라 공존하라 단군한국의 고토회복과 분열된 민족통합이라는 다물을 국시로 삼은 고구려는 대한민국의 미래다 이승만의 북진노선이 한민족의 다물정신 갇히지 않고 한없이 날고자 했던 고구려인들
노예로 살 것인가! 자유로 살 것인가!
대한민국 노예화가 최종 목적인 김일성일당의
처리문제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해법을 제시함
한민족의 백두산을 지나국에 넘겨 주고 경제지원받고 군사방패막이 해 주며 일가세습독재유지에만 혈안이 된
김일성일당은 한민족이 아님에도 불고하고 순진했던
베트남 야당세력처럼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며 종노릇하는
내부 종북간첩세력은 가차없이 사형시켜야 한다
[국민이 불안해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치권과 군대 안보교육 자료]
- 침략 도발자들과는 대화와 협력이 아니라,권력집단을 궤멸해야 승부가 난다 -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고 수없이 테러와 도발을 감행한
김일성 흉노왕조처럼 고구려를 수없이 침략하고 약탈한
모용선비을 공격하여 궤멸시켜 버린 고구려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 응징공격 후유증으로 후연(모용선비) 결국 멸망
태왕이 칼을 뽑은 것은 401년. 천부적 군사 감각을 갖고 있던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권력을 쥐고 있던 모용성(慕容盛)이 쿠데타로 시해되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권좌에 오르는 혼란기를 놓치지 않았다
5호16국 시기에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5만의 기마군으로 사방으로 포위하여 궤멸시켜 버린 공격 원인을 살피기 위해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와 선비족(鮮卑族)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선비족은 한나라(前漢) 북쪽에 살던 호전적 성향의 유목민이다. 고구려 역사에 선비족이 처음 등장한 것은 BC 9년으로, 삼국유사 유리왕본기(瑠璃王本紀)에 "선비족이 고구려 국경을 자주 침공하자, 고구려가 계략을 꾸며 힘센 선비족을 제압해 속국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수백 년 걸친 고구려-선비족 갈등을 종식시킨 광개토태왕
고구려 속국 된 선비족은 보복으로 광개토태왕 증조부 미천왕 시신 약탈
고구려의 속국이 되긴 했지만, 선비족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삼아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던 이들은 285년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외(慕容鬼)를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 293년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이때 모용외는 고구려 서천왕의 묘를 파헤치려 했다. 자신들을 압박했던 서천왕에 대해 일종의 복수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모용외는 도굴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도굴을 목적으로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선비족과 고구려의 갈등은 이후 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 시대를 거치면서 심해졌다. 후한의 낙랑(樂浪)군을 공격해 위명을 떨친 미천왕이 선비족 세력권이던 요동(遼東)지역을 자주 침공하자, 선비족도 이를 맞받아쳐 접전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두 나라가 감정의 골이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였다.
당시 선비족의 패권을 쥔 사람은 모용황(慕容皇光)이었다. 모용외의 뒤를 이어 337년 전연의 왕으로 등극한 그는 동생 모용인(慕容仁)보다 무공이 약하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고자 342년 고구려 침공을 감행했다.
수년간 복수를 다짐해온 선비족의 군사력은 강건했다. 그들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丸都城)까지 쳐들어와 궁성을 불사른 뒤, 유목민 전통을 따라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약탈하고,광개토태왕의 조부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후를 납치해 갔다.
이후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생모·왕후의 송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희귀한 보물을 1000여종이나 진상하며 송환을 요청했지만,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줬을 뿐 생모와 왕후는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두 나라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모용준(慕容儁)이 전연을 장악한 348년이었다.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자만에 빠진 모용준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수도를 업(業홙)으로 이전했다. 점차 한족의 풍습에 젖어든 그는 요동과 창려(昌黎)에 모용외의 사당을, 범양(范陽)과 연군에는 모용황의 사당을 짓고 참배를 드리게 했다. 유목민의 야성을 상실한 그는 고구려의 요청을 수락,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를 돌려보내 줬다. 하지만 역사는 교만한 자에게 냉정한 법. 호시탐탐 연(燕)을 노리고 있던 전진(前秦)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습을 감행, 전연을 붕괴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후 고구려는 전진과 문물을 교류하며 화평한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세력을 규합해 384년 후연을 세우면서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오랜 갈등은 또 다시 불거지게 됐다.
이번에 선공을 가한 것은 고구려였다.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385년 6월 후연의 본거지인 요동을 공격, 함락한 뒤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그해 11월 후연은 다시 군사를 보내 요동을 회복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민들이 다수 고구려에 투항했다”며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인근이며 기주는 베이징 200㎞ 남쪽의 내지(內地)로, 이 지역에서 유민이 투항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중국 내륙까지 깊숙이 뻗쳐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후연 무너뜨리고 북연(北燕) 세운 왕도 고구려 유민
392년 즉위한 광개토태왕은 그해 7월부터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백제를 침공해 10개의 성을 빼앗아 후방을 다져놓고, 북쪽의 거란을 공격해 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명을 이끌고 돌아온 그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 숙적 연나라를 주시했다.
태왕이 칼을 뽑은 것은 401년. 천부적 군사 감각을 갖고 있던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권력을 쥐고 있던 모용성(慕容盛)이 쿠데타로 시해되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권좌에 오르는 혼란기를 놓치지 않았다. 군사를 몰고 쳐들어간 대왕은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해 기염을 토한 뒤, 여세를 몰아 중국 내륙을 공략했다.
이 사실에 대해
자치통감(資治通鑑 卷113 晉紀35 安帝元興3年 12月條, 高句麗侵燕)과
삼국사기(三國史記 廣開土王本紀 十三年條, 十二月 出師侵燕)는
“고구려가 쳐들어 갔다(侵)”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진서(晉書 卷124 慕容熙載記, 會高句麗寇燕郡 殺略百餘人)는
“고구려가 도적질을 했다(寇)”고 기록하면서 “100여명을 죽였다(殺略百餘人)”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도적질 했다(寇)는 진서의 표현은 중국인들이 이 사실을 격하했다는 의미”라며 “따라서 100명을 죽였다는 기록 역시 사실과 달리 축소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북경 일대는 연이라 불렸다”며
“전연·후연 같은 나라 이름에도 ‘연’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북경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정치·군사적 요충지”라고 말했다. “그런 요지가 고구려에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지나인들이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란 얘기다.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북경을 유린한 광개토태왕이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위해 선비족의 사당을 유린했을까. 아쉽게도 이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연에 줬던 1000여종의 보물을 되찾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은 말이 없다. 선비족과의 수백 년에 걸친 갈등 과정에서 연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무사히 송환됐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다.
다만
△수도를 유린당한 후연의 모용희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 또 다시 패했고
△강성해진 고구려가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406년 궁궐을 중수(重修)했으며
△이듬해인 407년 고구려 유민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살해한 뒤 북연(北燕)을 건국해 왕이 됐다는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운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북연의 왕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 사람으로 스스로를 고양씨라 칭하며 고(高)씨를 성씨로 삼았다(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광개토태왕의 게릴라 공습으로 인해 후연이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점과, 북연을 건국한 고운이 광개토태왕에게 같은 종족으로서 예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뤄, 5세기 초 고구려는 아시아는 물론 북중국의 질서까지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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