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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일가 돈줄 개성공단 복원하라는 종북세력은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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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윤*현 조회수 1491




광주학살 주범은 전두환이고, 공범은 김일성이다!


두넘은 광주학살을 통하여 권력을 차지,유지했다!


김일성은 적화 후에 저항적인 전라도는 씨를 말려야

 

한다고 북 최고 간부회의에서 지시한바 있다!


전두환은 권력잡고 박철언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범 테러범에 불과한 김일성을 40년간


민족의 평화실현에 헌신한 공로에 존경 표한다고




노골적으로 김일성을 고무찬양한 넘이다! 따라서





전두환 추종세력과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종북진보세력은 동급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




후방 깊숙이 파 내려 온 땅굴을 통하여 남파된 대규모


부대가 어느날 갑자기 대한민국 군복을 입고 대한민국의


각 지역을 활보하며 군부대.관공서들을 제압,접수하게


된다면? 가정이 아니라 땅굴분쇄가 없다면 현실이 된다!









[자료]임청용 탈북 장교,남파된 특수군과 사진촬영까지 했던 김정일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은 전 북한인민군 특수부대 대위 출신이다. 그는 2009년 탈북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을 발간했었고, 이에 앞서 2006 1220일에는 5.18단체들을 향해 “5.18광주침투 북한특수부대를 두고 공개토론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그들의 반응이 없자 2010년 천안함폭침 사건이 발생한 후 남북의 첨예한 긴장관계 하에서 또 다시 5.18단체들에 대해 진실 앞에서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 5.18북한군침투 문제를 두고 공개토론 하자고 했으나, 5.18단체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임천용 대표는 또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5.18광주 침투 북한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임천용은 2010 5.18북한군 광주침투를 두고 5.18단체들에게 공개토론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심에 어린 충고와 조언을 했는데, 북 특수군 남파와 관련한 임청용의 주요부분을 발췌 해 보았다.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서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 300)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여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 300)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년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525.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2014년 5월 13일부터 많은 매체들이 청주시 흥덕지구에 1m 깊이로 질서있게 가매장된 단체유골 430구의 존재를 보도했다. 이들의 시체포장 방법은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법이며, 오직 광주의 다급했던 상황에서 광주시체를 포장했던 그 방법과 동일했다. "칠성판" 이라 불리는 나무판 위에 시체를 놓고 두꺼운 비닐로 둘둘 말은 후 그 위에 일련번호가 쓰인 시체들이다. 이 430구의 유골은 그 후 보도가 안 되었고, 흥덕경찰서와 청주시청은 화장을 했다고 하지만 여러 경로로 알아 보니 화장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공화국 영웅이기 때문에 지역 간첩들이 각별히 조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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