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후의 권력의 빈자리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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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이*진 조회수 699 |
역사는 무릇 권력을 찾이한 자와 권력을 뺏긴 자와의 한풀이 도돌이표라 문득 생각이 들었다. 며칠 신문과 언론을 접하면서 5,18행사에 왜 이다지도 시끄러워야 하는지를, 왜 이다지도 <노래>하나에 정치권들과 언론이 난리인가를 생각하면서 일반인들은 그닥 관심도 없는 것을 왜 정치권들과 광주가 목을 메고 있는걸까???? <노래>하나로 <임을 위한 행진곡> 하나로 분란과 분열을 일으켜야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도 모르고 곡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인데. 그 노래가 그다지도 중요한 것일까??/ -부르고 싶은 사람 부르면 되지, 왜 부르기 싫은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부르게 하는건지- 그들에게 무슨 특권의식이 있는건지?????? 그 노래 부르면 영령들이 좋아한다고 생각이 들고, 그 노래 안부르면 영령들이 싫어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그 <노래>를 매체로 하여 어떤 정치적 권력을 시도하려고 하는걸까????? 어쨌든 그 당시, 1980년대는 권력의 자리는 비었고 그 권력을 향하여 부나방처럼 권력을 쫓는 자들이 있었다. (존칭 생략하겠음) 신군부세력인 전두환, 신민당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 그리고 김대중(국민연합당?????) 그리고 백기완 및 재야세력들과 운동권 학생들이 서로 권력을 찾기 위하여 나라가 무정부상태였던 것이다. 최규하정부는 과도기 정부였고, 최규하는 권력을 쫓고자 하지 않았다. 나라는 지도자를 잃고 슬픔에 잠겼으며, 나라의 정세는 어지러웠고, 매일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은 슈류탄을 날리며 아수라장이었고, 북한은 이 때를 호시탐탐노리는 절대절명의 위태로운 시대였다. 이 때는 누구든 이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 당시는 누가 되는 권력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북한과 대치한 마당에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인 것을. 그래서 전두환은 권력을 잡았고, 5,18은 수습되었고 계엄령은 해제되었고 평화가 온 것이다. 근데 그 과정에 무장시민군인들과 계엄령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유혈이 있었던 점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5,18사건을 두고 정치가 바뀜에 따라 각기 다른 정치적 심판을 내린 것이 비극이 시초가 되었다. 언젠가는 5,18에 대하여 정치적 심판이 아닌 역사적 심판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통일이 되어야 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런가?) 1.첫 번째 재판은(1980)은 김대중을 내란의 주동자로 사형 언도했다가 사면 복권되었고, 5,18은 무장폭동(내란)이라 명명하였다. 2.두번 째 재판(1997)은 전두환을 내란의 주도자로 사형 언도했다가 사면되었다. 그리고, 5,18은 민주화운동이고, 그 당시 시민군은 준헌법기관으로서의 정당방위가 성립된다는 판결이 난 것이다- 근데 똑 같은 산건에 똑 같은 수사기록인데, 재판은 서로 반대로 나온 것은 이거 위헌소지가 있는 것 아닌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도 어긋나고, 그리고 12,12로부터 518까지를 내란으로 소급해서 억지로 꿰다 맟춘 것도 위헌인 것이고 그리고 그당시 연행되고 구금되었던 ys, dj의 앙갚음같기도 하고 어쨌든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니깐??????? 그후로 5,18은 성역화가 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불리워지기 시작했고 2004년 광주보상법(특례법)이 다시 개정됨에 따라 유공자와 포상자의 범위가 한층 확대되었다. (단순 시위가담자, 훈방하고 풀려난자도 포함시키는 법을 제정함. 5,18을 기하여 5,18묘역에 잠든 영령들과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군인 및 경찰들의 영령에도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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