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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탱크 김광일입니다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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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과 문화가 동일한 부여와 상나라는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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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5윤복현 조회수 810










양심 하나님이 통치하는 대한민국!






지구촌 중심의 한민족 시대

우리의 영원한 님은 우주만물을 공정한 순환구조로 창조한 유일신 조물주 양심 하나님 말고는 없는 것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 서영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자유.나눔.섬김을 위한


양심의 회복이 혁명이다


"내가 뒤에 있느니라!"


양심 하나님의 명 따라




나라와 민족과 인류의


뿌리되는 민초와 함께 하는


동방의인이 앞서 가나니


역사를 바꾸고자 하는


산 자들은 따르라!

 

1만년전에 이미 마고한국의 문자인 갑골문자(한자의 기원)와 한글이 존재했다






단군한국을 계승한 부여와


지나문명을 꽃 피운 상나라는


왜 문화.풍습이 동일한 것인가?


그것은 동일한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즉,


마고문명을 계승하여 홍산문명을 꽃 피운


요서지역에서 갈라져 나갔기 때문이다.


찬란한 농경.제천문명을 일구어낸 홍산인들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하수가 메말라 버리자


일부는 남진하여 황하강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동진하여 요하 동쪽 만주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홍산인들의 풍습과 문화는 그대로


후손에게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홍산문명이


상투를 튼 한민족의 문명임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언어가 다른 지금의 지나족도


결국 한민족임을 인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1만년 역사의식이


있는 인재들로 구성된다면 고토 만주회복은


물론 한민족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지나대륙도


한민족의 분국으로 충분히 만들 수가 있다.


언어가 한국말로 통일되면 한민족이 되는 거다.


지구촌으로 확산되는 대한민국 한류혼의 힘이다


[자료]고등학교 국사시간 때 부여는 우제점을 쳤다고 달달 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여의 제사문화가 은나라의 것과 거의 똑같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위 기사는 군사활동이 있을 때마다 부여에서는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의 굽뼈로 점을 쳐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부여의 점복기사는 이것 말고 또 있다. 위나라 어환이 편찬한 위략에 실려있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전하지 않고 그 일문(佚文)이 당나라 초기 장초금이 편찬한 『한원』「번이부」 부여조에 보인다.

 

발굽으로 점을 쳐서 그 조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한원』「번이부」 부여조

 

고대 중국의 상나라(은나라)는 부여처럼 우제점으로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부여와 은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신석기시대 발해연안에서 발생한 갑골문화가 상인(商人)들의 선조들이 황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상나라에 갑골문화가 성행했다고 보고 있다.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이 동이족들이 황하 하류로 남하하여 상왕조를 건설하고 갑골문화를 발전시켰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은(상)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부여에서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고 한 문구를 들 수 있다. 은나라 정월, 이는 은나라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부여에서는 은대 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음력 2월)에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부여는 흰 색을 숭상했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그런데 부여의 흰색 숭상과 관련하여 『예기』는 의미심장한 기록을 전한다.

 

하나라 시기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 황혼에 입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의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 시기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나라 시기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 일출시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적마를 타며, 희생물은 적색을 바친다.

『예기』「단궁상」

 

예기의 이 기록은 하나라는 흑색을, 은나라는 백색을,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다고 한 내용이다. 은나라가 흰색을 숭상한 것과 부여가 흰색을 숭상한 것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부여와 은의 상관관계에 대해 또다른 증거로 이형구 교수는 부여의 순장제도를 들고있다.

 

사람을 죽여 순장하였는데 많을 때에는 백여 명이나 된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부여에서는 많을 경우 백 수십명을 순장했는데, 은나라 역시 다수의 사람들을 순장했다. 1001호 대묘에서는 360명의 순인이 발견되었다. 동양 고대사회에서 순장제도는 주로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황전악은 "사람을 죽여서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습속으로 이와 같은 습속은 은왕국의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했을 뿐 아니라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다"고 하였다. 황전악은 동이문화권에서는 은나라처럼 순장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요동반도 강상, 누상무덤에 보이는 백여명의 순장 흔적(고조선), 고구려, 신라에서 엿볼 수 있다.

 

부여의 점복신앙,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흰색 숭상, 순장습관 등을 근거로 이형구 교수는 부여, 은나라, 고구려의 관습들이 상당히 일치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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