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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6윤복현 조회수 610



색불루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색불루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더 원-아프다/법치를 무너뜨린 분열은 모두가 아프다! 


단군한국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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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홀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아홀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색불루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1대 소태 단제의 반민주성에 반발하여 군사혁명으로


즉위한 단군한국 22대 색불루 단제(지구중앙국 통치자)


단군한국을 침략한 은나라를 정벌,중국지역을 평정하다!






색불루(索弗婁) 또는 색부루단군한국의 22대 단제였다. 단군한국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의 손자다.


기원전 1286년에 유라시아 초원에 해당하는 단군한국의 서쪽과 북쪽을 모두 평정한 조부인 우현왕 고등을 세습하여 우현왕이 된 색불루(索弗婁)는 21대 소태 단제가 당시 국정총괄하는 5가의 만장일치 추대 방식을 외면하고 수유족 좌현왕 서우여에게 단제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색불루가 여러차례 간청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자 군사혁명을 일어켜 스스로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21대 단제 소태(蘇台)는 그에게 반기를 든 혁명군 색부루(索弗婁)와 싸워서 패하고, 아리수라는 강이 있는 아사달에 숨게 되었다. 우현왕의 손자 색부루가 즉위하니 마한(한반도-열도를 다스리는 부단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 오지 못했다.


색불루는 즉각 개천령(盞天鈴)을 지휘관으로 한 토벌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서우여 군과의 싸움에서 불행히도 개천령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혁명으로 군력을 쥐게된 단군한국 22대 색부루 단제 이후에 병권 분열과 내분으로, 결국 3조선으로 나눠졌다.


22대 단제 색불루가 즉위한 계축년은 색불루 임금의 원년이다. 그런데 고리(고려=고구려)족의 색부루가 군사로 혁명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한문식인 조선(숙신)으로 바꾸면서부터 정식 국호가 되었다.또한 당시 단군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기술한 [번한세가]에는 '진'으로 국호를 총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한국 이후 한반도 남한지역을 기술한 [후한서/한전]에도 '진국'이라는 국호가 기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군한국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증한다.


색부루 왕검 원년 5월 삼한(신한, 맑한, 밝한: 왕들의 칭호)의 이름을 삼조선(신조선 맑조선 밝조선: 분국의 칭호)으로 개칭하였다.


색불루는 차기 단제로 지명되었던 서우여와 그 지지자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소태 단제의 종실 서우여를 번한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아홀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새로이 단군한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제22대 단제 색불루는 상나라와 싸워 이긴 후 도읍(안양)을 점령하였고,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아홀 단제는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 가서 지금의 강소성 지역인 회대 땅을 평정하였고 마침내 해대(海岱)의 위에 주둔하였다.

 아홀 은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색불루 단제 즉위 첫 해에 맏아들 아홀(阿忽)을 태자로 삼았다. 즉위  6년에 육우(陸右)가 아뢰기를 “길림(吉林)은 천년동안 도읍할 땅인데 대운(大運)은 이미 다 가고 영고탑(寧古塔)[주:寧古塔-지금 만주 목단강(牧丹江) 아래의 영안(寧安)]은 왕기(王氣)가 서려 있으니,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시켜 영고탑에 성을 쌓았다.

 

10년 10월에 황무(黃霧)가 끼었다. 36년에 반역하는 신하인 신독(神督)이 군사를 일으켜 궁성에 쳐들어옴으로, 임금께서 영고탑에 피난하셨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영고탑에 이주하여 살게 되어 동북방의 큰 도시가 되었다. 단제 색불루 재위 48년 (丙申元年) 단제께서 명하사 녹산을 보수 건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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