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 남말하는 뻔뻔스러운 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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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4 김*수 조회수 238 |
정확성을 거부하면서 상대방에겐 완벽성을 요구하는 言論
‘산소통을 메고 들어간다’는 황당한 誤報를 거듭하는 기자들의 오만과 無知가 ‘진실된 교훈’을 압살하고 있다. 李東昱
바다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연일 현장 보도가 신문과 방송을 압도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들도 검증없이 보도되고 이로 인한 질타도 뜨겁다. 헌데, 유독 바다에 대해 우리는 무식하고 여전히 그 무식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 듯하다. 그 중 가장 거슬리는 표기가 ‘산소통 메고 들어가는 잠수부’라는 표현이다. 1등 신문이라는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니다.
‘산소통’은 ‘Oxygen Tank’로 의료계나 산업현장에서 용접용으로 사용하는 실린더를 말한다. 다이버들이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면 산소 중독으로 경련을 일으키다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실제로 다이버들은 ‘산소통’이 아니라 ‘공기통’을 메고 들어간다. ‘공기통’은 ‘Air Tank’로 압축된 공기를 담은 실린더를 의미한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78.5%의 질소와 20.95%의 산소 그리고 0.55%의 아르곤과 같은 활성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量으로 따져도 ‘질소통’에 가깝지 ‘산소통’은 아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무도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경제성장과 함께 레저 인구도 급성장해 우리나라의 스쿠버 다이빙 인구가 대략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2만 명이 넘는 기자들 가운데 스쿠버 다이빙을 해본 기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스쿠버 다이빙과 관련한 지식 정보는 상식의 세계에 속할 것이다. 최소한 ‘산소통’과 ‘공기통’을 구별해 표기할 수 있을 텐데도 이런 誤記(오기)는 고쳐질 줄 모른다.
바다와 관련된 지식의 부족함은 서식지와 생김새가 다른 ‘숭어’와 ‘송어’의 혼란에서도 드러난다. ‘슈베르트의 숭어’를 지금도 버젓이 음악교과서에 싣고 있으며, 잘못 되었다는 지적이 여러 해 전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三面(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토에서 살아온 우리의 不正確(부정확)한 不誠實(불성실)이 부끄럽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이 폭침되었을 때 우리 국민은 거센 조류 앞에서 시신과 함체의 인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학습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 4년 뒤 우리가 겪는 이 불행에서 그때의 학습효과는 얼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필자도 다이빙을 즐긴다. 1979년에 첫 다이빙을 한 이후 지금껏 여유가 되면 다이빙을 즐기며 횟수로도 200회 이상이니 아마추어로서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구조 다이버 자격증과 마스터 자격증도 갖고 있다. 深海(심해)잠수는 65m까지 기록했고 수중탐사로 수심 45m 아래의 북한이 판 땅굴로 의심되는 곳을 탐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2노트 이상 되는 潮流(조류)는 마스터 할애비라도 불가항력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거슬러 갈 수 없다. 필자는 수심 30m 부근의 視界(시계)가 20cm도 안 나오는 뻘탕 속에서 강한 下降(하강) 조류를 만나 표류하게 된 사고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길게는 한 시간 반 이상 표류하다 지나가는 여객선에 의해 겨우 구조된 경험도 있다. 그때가 2노트였는데 하물며 6~8노트의 조류에서랴. 이 정도의 조류는 마치 대형 트레일러를 날려버리는 허리케인 앞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언론들은 빨리 구조하지 않는다고 성화다. 정작 현장에서 목숨을 내 놓고 구조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은 말이 없다. 그들을 대신해서 말해줄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빙을 좀 안다는 필자는 작금의 언론행태가 밉다.
2. 말과 글이 땀과 기술을 압도하는 과정
급류에 발 한번 담궈보지 못한 자들이 정부를 탓하고 현장의 전문가를 비난하며 완벽하지 못한 제도와 절차를 헤집는다. 이 틈에 전문가를 자처하는 가짜들이 설친다. 설치는 자들은 한결같이 ‘名分(명분)’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 ‘名分’은 陣營(진영) 논리를 낳는다. 名分이 같으면 언론도 엄격하게 검증하지 않는다.
홍XX라는 여성이 MBN에 등장해 ‘민간 잠수부’라며 떠벌릴 때 웬만한 다이버들은 한 눈에 ‘저건 가짜’라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유흥가 주변에서나 볼만한 체구로는 잠수장비를 제대로 운반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민물이 아닌 바다에서라면 부력을 상쇄시킬 鈉(납) 벨트만도 8Kg 이상을 허리에 둘러야 한다. 특히 수온이 낮은 서해바다에서는 신체를 물과 완전 분리시키는 드라이 수트(Dry suit)를 착용해야 하니 벨트는 그 보다 훨씬 무거워진다. 공기통까지 포함하면 40~50kg의 중량을 견길 수 있어야 한다.
저런 몸매로는 관광지에서 레저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몇 번 해 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한 눈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거센 조류에 맞서며 수중 30m 부근에서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엔 知力(지력)은 고사하고 體力(체력)으로도 역부족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의심나면 다이빙 경력부터 물어보거나 확인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방송인들은 이 절차를 생략했다.
이XX라는 사람도 그날 오후 MBN에 등장해서 현장의 구조작업을 비판하며 ‘다이빙 벨’을 쓰면 된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던 이 사람의 주장이 이미 황당한 내용이었음이 밝혀진 지도 4년이 다 돼 가는데, 방송과 언론들은 진영논리에 휩싸인 채 李 씨의 낚시밥을 또다시 덥석 물고 말았다. 하지만 ‘다이빙 벨’은 급류에서 무용지물임이 서서히 밝혀졌다. 뒤늦게 방송과 언론들도 발을 빼는 중이다.
아마추어들이 전문가를 압도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땀과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세상이 됐다. 이들은 말과 글로 명분을 만들어 칼로 삼는다. 칼자루를 쥔 쪽은 사생결단하고 상대를 공격하면서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 단죄하려 든다. 거짓이 사실을 압도한다. 명분으로 무장한 진영논리가 거짓세력을 권력화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士林 당파가 무색하다.
왜 우리는 정확성에 대해 둔감한 국민이 되었을까? 왜 우리는 정확성을 거부하면서도 상대에게는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이런 증상을 앓기 시작한 것일까? 수 천년 이어져 온 ‘주먹구구의 문화’를 타파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급속히 ‘명분’과 ‘체면’을 앞세우는 조선조 유교사회로 침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리분별을 따지면 ‘과격하다’, ‘싸움꾼 같다’란 손가락질이 드세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변론을 이어가면 어느새 ‘일리 있다’며 편드는 패거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패싸움으로 변모한다. 패싸움은 항상 이 나라의 정치권 어느 언저리와 맞 닿아있고, 그 양태는 조선조 黨派(당파)싸움의 모양새를 띤다.
절대로 사실이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명분만 있으면 그 어떤 거짓말도 세력을 형성해서 살아남는다. ‘명분’은 선비가 重視(중시)여기는 ‘예의’와 ‘체면’의 방패가 된다. ‘명분’을 보호막으로 삼는 ‘예의’와 ‘체면’만 갖춰지면 ‘인맥’과 ‘신분’도 유지된다. 선비가 중시여기는 ‘예의’와 ‘체면’이 전문가들이 중시 여기는 ‘사실’과 ‘정직’을 압살한다.
사실을 기록한 역사를 뒤틀고도 여전히 學界(학계)에서 군림하는 학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誤報를 밥 먹듯 하고도 살아남는 언론, 헌법의 해석을 제멋대로 해도 身分戰線(신분전선)에 이상 없는 검찰과 사법부도 한 통속이다. 민생법안을 장식품 정도로 치부한 채 궤변으로 날을 지새우는 정치권이 그들의 대표주자이다. 이들 모두는 말과 글로 밥벌이를 하는 지식층으로서 조선조 선비들의 DNA를 불려 받았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거짓과 無知(무지)의 암흑속으로 침몰시키려 하고 있다.
다시 세월호 참사로 눈을 돌려 보자. 정작 세상이 무너질 듯한 절망속의 유족들에게 빛이 되어줄 救援(구원)의 말과 글은 거짓 선동이 아니라 올곧은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정직한 말과 글만이 그들에게 오늘의 悲劇(비극)을 딛고 일어설 힘이 된다.
며칠 전 기고된 金東吉 선생의 ‘Life must go on though good men die (선한 자가 죽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글처럼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 정직해야만 진정한 용기가 생겨난다. 비극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직함으로 이번 사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불확실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 살든 프랑스에 살든 아프리카 밀림이나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살든 이런 비극이 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고에서는 神을 믿든 안 믿든 무관하고, 착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상관없으며,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무차별적으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을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敵은 지금도 불확실성의 커튼 뒤에서 우리의 삶을 노리고 있으며,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불확실성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줄여가도록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노력하자는 다짐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救援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체면이나 허풍같은 허위의식은 벗어던지고 냉철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과 無知의 암흑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이 처음 이 세상에 나오면서 시작된 ‘啓蒙主義(게몽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언론 스스로가 가장 먼저 계몽되어야 할 것 같다. ■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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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2014.04.25 02:22
김윤수님의 수준 높은 칼럼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좋은 글 희망합니다. 저질의 내용이 판치는 와중에 모처럼 신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