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는 그와 가장 닮은 싱가포르 수상 이광유(리콴유)였다. 리콴유는 1979년 10월 16일에 방한했다. 박대통령이 그를 초청한데는 '내가 건설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번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리콴유에게 자신의 작품인 포항종합제철을 보여주고 싶어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겠다고 했다. 외무부에서는 리콴유가 포항공항에서 내려 경주로 향할 때 포철을 관통하는 도로를 주행하여 가도록 짰다. 리콴유는 차창 밖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경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길 양쪽은 화려한 가을 날씨 속에서 풍요로운 농촌 풍경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었다. 리콴유는 비로소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귀국의 농촌은 아주 실속있게 잘 사시는 군요' 라며 말문을 땠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발전의 비결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김성진 장관은 박대통령의 지도력과 외국에 나가 있던 우수한 두뇌들을 귀국시켜 국내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정책을 들었다. 10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리콴유는 박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데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박정희와 리콴유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개발도상국의 현실과 동양문화의 토양에 적합한 자주적 정치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점에서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분단과 주한미군의 존재라는 제약만 없었다면 리콴유처럼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식 정치이념을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 싱가포르 리콴유 전 수상 -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한국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After the war, South Korea's economic dynamism overrode my past prejudices. I visited the country in October 1979 when President Park Chung Hee received me in his official residence, the Blue House. Park was an ascetic - looking man, small and wiry with a sharp face and a narrow nose. He has been chosen and trained as a military officer by the Japanese. He must have been among the best of his generation......
전후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그릇되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1979년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절제된 듯한 인상을 풍겼고,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갸름한 얼굴, 날렵한 콧날은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분명히 그 세대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He had no small talk at dinner that night(October 19, 1979). His daughter, in her twenties and English -speaking, kept the conversation flowing. Park said his training was that of a military officer, and his job was to take the advice and recommendations of the experts whom he had appointed as ministers and top officials, and decide policy....
1979년 10월 19일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말이 없었다. 영어를 잘하는 20대의 영애(박근혜)가 대화를 이끌어 갔다. 대통령은 자신이 군지휘관의 관리기법에 익숙해져 있고, 장관이나 고위관료로 임명한 전문가들의 조언과 권유를 수용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고 했다.......
Park had been in power for 18 years and had got the economy thriving with a disciplined and united people, all of whom were determined to achieve economic modernization. Following Japanese practice, he jealously protected his domestic market and exported aggressively. He encouraged, even forced Koreans to save, denying them luxuries like color television sets which they were exporting in increasing numbers. I was impressed by his strong will and grim resolve for Korea to suceed. Without Park, Korea might never have made it as an industrialized nation.....
박 대통령은 18년간 집권하면서 성공적 경제근대화의 결의에 찬 근면 협동하는 국민과 더불어 경제번영을 이룩해 냈다. 일본식 경제성장방식을 쫓아 그는 적극적으로 내수시장을 보호하면서도 공격적으로 수출을 시도하였다. 국민들에게는 수출 품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컬러 TV와 같은 사치품은 사용하지 말고 저축을 하라고 장려하였다.
나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한국을 성공시키려는 결의에 감명을 받았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한국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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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 2014.05.27 21:03
어쩌면 맞는 말이 아닐까? 아니 그분이 아니었어도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대한민국은 산업국가의 대열에 서있을수도있겠지만 밀어주는 원동력과 끌어주는 리더쉽이 정말 적중하지 않았나...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