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다시 불붙은 박정희 친일종북논란으로 게시판 후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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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황*인 조회수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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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증선의 주장을 토대로한 조갑제의 주장
유증선의 증언 내용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②혈서 작성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 사실 : 호적을 고치지 않았다. ②혈서 작성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이 해 가을(1939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 실제 사실 : 혈서가 만주까지 가는데 1주일 걸린다고 하였으니 38년 5월에 만주지역의 어떤 신문에 보도가 되었을 것이다. 만주일보 어디에도 그런 기사는 없다. 또한 만주일일신문에도 나와있지 않다.
1938년 5월에 혈서를 작성했다고 하는데, 1기 입학 시험은 38년 10월에 있었다. 모집요강이 시험보다 5개월이나 앞서 있었다는것이 의문스럽다. 1939년도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일자는 10월3일로 아직 시험공고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훨씬 전에 입학청원 혈서를 보냈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는 맞지 않다.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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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 2013.11.11 23:41
충분히 제기할수있는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문제제기가 논리적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