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옥(鄭順玉)의 말)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때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박 선생님과 일본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놀게 되었다.
그때 일본이 선생 한 분이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 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너희들 저 말 잘 새겨 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 당하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반박한 기억이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전경숙(全慶淑)의 말)
박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모친"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주셨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였다.
5학년 20명과 2학년40명을 한교실에서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 천정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완비하여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한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너희들도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노래와 나팔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악대와 합창반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을운동회 때는 박 선생이 기마전, 기둥 넘기기, 공바구니 터뜨리기,텀블링을 지도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소풍 때 문경새재를 갔을 적에는 제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되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생님의 별명은<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이순희의 말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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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 2013.11.11 21:29
그런 애국심이 투철한 박정희가 독립군으로 갔어야지 스스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에 설립한 만주신경군관학교를 다니고, 일본육사를 다녀 일본군소위이자 만주군소위인 황군이 되었을까? 소학교교사 그만두고 상해임시정부로 가거나 광복군으로 가야지 앞뒤가 맞는 말 아니냐? 애국심 강했다는 박정희가 왜 자진해서 독립군이 아닌 일본군장교가 되고자 했을까? 잘 생각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