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말살할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허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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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이*주 조회수 99 |
일본군 장교였던 김수환 추기경도 친일파였겠군요?
그리고 '일본군 복무하면 닥치고 친일' 이 논리대로라면 김대중 대통령도 친일 아닌가요?
목포상고 졸업앨범입니다. 빨간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목포상고 학생회장이었던 김대중입니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이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씨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습니다. 즉, 김대중은 친일파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대일본 제국을 위해 나가서 싸우자며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당시 일본군복입니다. 김대중이 입고 있는 것과 100% 일치하죠.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기준을 갖고 본다면 김대중은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짤 두 개만 더 첨부할게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학생 대표로 축사를 읽었다는 말이 있는데
생도 대표 이름 잘 보세요.
결론. 개구라.
3.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박정희는 일본 육사가 아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겠죠.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주군이었던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에서 두 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을까요? 어차피 충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건데요.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을까요?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나라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만주군을 일본군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만주국 경찰로 복무했던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입니다.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위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입니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겠죠.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한 겁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나요?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옵니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무슨 생각이 들까요? 마찬가지인 겁니다.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한 겁니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을 보면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습니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 김대중이고 뭐시고... 워싱턴 장제스는 그렇다 치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쓴 X끼잖아' 하겠죠.
자, 좋아요. 그럼 이제 박정희 혈서 들어갑니다.
4. 박정희 혈서 진위여부 논란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일혈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되었다네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 씨의 증언이 나옵니다.
"1938년 5월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께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①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라는 부분과 ②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일단, 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은 몇 살이었을까요? 관련하여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보면 응시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증선이 증언한 바 당시 1938년이면 박정희 나이가 22세일때인데, 한 두살 낮춘다고 응시자격이 생겼을리가 없겠죠.
이쯤에서 유증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중앙일보 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유 선생의 지적처럼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시험을 쳤기 때문에, 그로부터 1년 5개월 전에 혈서를 보냈다는 얘기는 여러모로 의심이 가네요.
당시에는 모집여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1939년에야 만주군관학교 설립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유증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재학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여서 하사관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 미만까지 지원할 수 있었으므로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고민했네 어쨌네 하는 것은 개구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 믿으실까봐 증거자료 첨부합니다.
(출처는 앞의 왜말 문서와 같습니다)
두번째로 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제 음력 생일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정희는 나이를 고친 적이 없는 거죠.
혈서 위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앞서 혈서가 공개된 신문이 1939년 만주일보라고 했는데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되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입니다.
이에 당황한 민족문제연구소(박정희 혈서 떡밥을 공개한 데)는 만주일보가 아닌 만주신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알 거면 제대로 알고 까시든가...
게다가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건 1939년 2월 24일에 이미 만주군관학교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왜 기사는 1939년 3월 31일에 나왔을까요?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혈서 이야기는 이것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혈서지원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만주일보 사본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징모를 말그대로 풀이하면 징집과 모병을 뜻하는데, 만주국이 국병법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1년입니다. 징모라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 것이지요. 만주국 발행 정부공보를 아무리 뒤져봐도 징모과는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만주군관학교의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출한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한번 되네요.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 정모과라는 부서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징모과와는 엄연히 다른 부서입니다.
분명 '재신경칙위치안부군형과'라고 되어 있네요. 존재하지 않는 부서에 혈서를 제출한 박정희의 정체는?
추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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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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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 2013.11.11 21:16
↓진선하? 전라도는 친 엄마까지 따먹는 곳이라서 못믿겠어용^^
진*하 2013.11.11 21:12
너가 올린 글 아랫부분에 ....일제가 1945년에 작성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 따르면 박정희는......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 박정희가 기록되어 있다는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느냐? 바로 일본군(일본육군)임을 증명한다. 그외 일본군인인명사젅에도 박정희가 나온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박*영 2013.11.11 21:06
보국대 빨갱이 연구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