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동기생 이재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너 댓살 아래인 1기생들로부터 구타 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국인 중에 홍사익이라는 중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육사 26기를 졸업하였고, 2차 대전 후 전범자로 처형되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찾아와 조선인들만 모아놓고 훈화를 한 적이 있었다.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과묵하기만 했던 박정희가 감동적인 열변으로 답사를 하여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1기생 중에 이기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 때 국군으로 전향하여 사단장을 마치고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만주에서 그를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왜놈 보기 싫어 왔다고 말하더라. 나는 그 때 왜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북에서는 일본놈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로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일요일이면 내 관사로 찾아와 놀다가 갔다. 가난했던 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무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담배와 술을 매우 좋아 해서 나는 배급표로 정종으로 바꾸어 대작하곤 했다. 그는 일본놈들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우리는 곧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박기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만군 준위였고, 와세다 대학,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정일권 상위는 만군 헌병사령부에 근무하였는데 자주 박정희 생도를 불러내 저녁을 사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박정희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의 노래를 불렀다.
1940년부터 창씨개명작업이 시작됐다. 성을 일본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배급도 주지 않고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그는 검도, 유도, 승마, 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출중했고, 1942년 3월, 420명 중 1등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아울러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재학생 송사에 대한 답사를 했다. 그 모습이 뉴스영화로 쵤영되어 많은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이 모습을 보고 고무되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 간 생도 중에는 강문봉이 있다. 그 역시 만주군관학교-일본군육사를 거쳐 군사령관을 마치고 3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성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유시간이면 운동장을 혼자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1944년,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위치한 관동군 635부대로 배치됐다가 이어서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됐다. 만주에 산재한 공비 즉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된 것 이다.
추신 : 독립을 꿈구며 ...... 독립하기 위해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란 말이 잇듯이 만주군소위가 되었고....
만주에서 조선인 군인를 비밀리에 모아 독립군을 지원했던 박정희!!!
빨갱이들아 이래도 할 말이 있는가?
좌빨인 민족문제연구소(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의 조직원 임준열등이 주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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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 2013.11.05 15:11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게시판을 어지럽히는 진선화 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