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그는 金大中인가? 尹大中인가? 諸葛(제갈)大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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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충무 칼럼] 김대중 묘비에 새겨진 출생의 거짓말ㅡ그 진상을 처음
밝힌다!.. [김대중x-파일] 전라도 검찰은 진짜 호적등본 찾기 위해 칼럼자의 사무실과 집을 3일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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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충무 칼럼)
지난 8월 18일 세상을 하직, 8월 23일 현충원에 묻힌 김대중씨의 죽음이 2개월도
못되어 국민들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10월 6일 오후 묘비 제막식 때문에 또 한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 파묻혀 있던 김대중인가? 윤대중인가? 제갈대중인가? 하는 치욕스러운 비밀까지 살아나게 했다.
김대중은 살아
생전에도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영.호남을 분열시키고, 호남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죽어서도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현충원 국립묘지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어 그를 비판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일그러진다.
살아 있을 때 나라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인데 눈을 감고 땅 속에 들어간 후에는 좀 조용해지고
편안해 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의 모습을 보라. 조용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노무현이 김대중 보다 한 수 높다.
물론 시끄럽고 어지러워야 과연 김대중 다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땅 속에 묻힌 이후에도 김대중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6일 묘비 제막식을 하는 이날 김대중 묘역 주변에는 약 200 여명의 추종자들이 모였는데 그 시각 현충원 국립묘지
입구에서도 200 여명의 비판자들이 모여 ‘김대중 국장과 현충원 안장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8월 23일
국립묘지에 안장될 그 시간부터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애국 시민단체들이 현충원 앞에서 “김대중 국장 취소, 현충원 안장 취소” 를 요구해 왔으며
시위를 하다가 때로는 경찰에 체포 당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경찰의 과잉 탄압에도 ‘김대중 국장취소, 현충원 안장취소 하라’는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아마 김대중의 묘를 파 낼 때까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추종자들과 전라도 사람들, 친북 左派들은
하늘 같이 받들어 모시는 김대중을 전라도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왜 그렇게 싫어하고 외면하고 있을까?
▲ 보수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현충원 정문에서 ‘DJ 묘비 제막식 우상화 규탄’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 | 그 대답은 간단하다. 묘비가 제막되는 그
시간 현충원 앞에서는 “김대중은 진짜 보다 거짓이 더 우상화 되어있는 인물”이라는 피켓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김대중은
그 인간에 대한 진실 보다는 거짓과, 가짜, 짝통이 너무 과대포장 되어 우상화 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김대중 광신도들이
‘김대중 종교’의 교주처럼 떠 받드는 꼴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백제 계백 장군 이후에 태어난 영웅” 이라고 까지 하지 않던가?
6일 제막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일대기를 소개한 내용만 보아도 얼마나 거짓 투성이로 만들어져 있는지? DJ가 걸어온 길을
아는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거짓말이 저 정도면ㅡ묘비 문을 지은 사람도 제2의 김대중이를 닮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자신은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김대중의 거짓말 가운데 ‘기네스북에’ 오를 거짓말은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 약속은 안 지킨
일은 있어도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다”고 한 말이다.
아마 상당한 세월이 흘러도 이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거짓말을 조크 정도로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도 어처구니 없는 거짓투성이가 가득히 새겨져
있다.
이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거짓말과 진짜는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살펴보자.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 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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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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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2013.11.05 15:20
저도 이이야기 들은적있습니다. 대통령되기까지 별별 사연이 많았네요 이렇게 사연이 많은 사람이면 맑고 깨끗하다고 말할수는 없을것같다.
박*영 2013.11.05 13:50
굿~~이순주님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