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저격수다2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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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남로당 내가 알려줄께 공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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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김*종 조회수 127
. 박정희 대통령의 남로당 가입 동기는, 국가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형의 복수를 위한 것


1948년 11월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여순반란사건으로 군내 좌파의 숙군 작업을 벌이던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다. 죄목은 남로당의 비밀당원이라는 것이다. 전군의 5%정도인 4,700여명의 장병들이 처벌 받았고, 그 중 수백 명이 총살 또는 징역에 처해 졌으나 유독 박정희만은 살아 남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가 순순히 자백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는 이념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복수심에 의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주된 이유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이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뒤이은 10월 초,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인민항쟁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일제 때부터 항일 운동을 해왔고 당시 선산군 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박상희(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는 항일운동을 해왔다.) 역시 군중들과 더불어 구미경찰서를 공격했고 서장 이하 서원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그러나 대구, 왜관 방면이 경찰에 의해 질양되자 그들은 서장과 서원들을 풀어 주고 그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10월 6일 진압군이 들이닥치자 도주하던 박상희는 경찰의 총을 맞게 되었다. 

박상희의 죽음을 목격한 누이 박재희(朴在熙)에 의하면, "남편이 이불에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박상희를 업고 왔고...총 세 발을 맞은 박상희는 곧 숨을 거두었다" 한다. 


형이 죽을 당시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박정희는 형의 장례식에 내려가 보지도 못했고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가장 따랐던 형의 죽음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그의 자술서에서 남로당에 입당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중에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 주고 있었고 박정희에게도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면서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남로당 가입을 권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원수를 갚자는 말에 박정희는 넘어갔다. 당시의 공산주의의 이미지는 지금과는 달랐다.)

그가 군부 내 좌익 색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국가를 배신할 목적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이 아님이 밝혀지자,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구명에 나섰다. 심지어 숙군을 직접 담당했던 김창룡과 김안일(金安一)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白善嬅)에게 숙군에 협조적인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를 만나본 백선엽은 박정희가 구명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구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군부 내 좌익색출에 협조적 태도를 보였다"는 말은, 그가 국군 내의 좌익들을 밀고하였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자기가 속한 집단이 6.25를 거치면서 명백히 국가에 해로운 집단으로 판명난 상황에서, 그 명단을 넘기는 게 배신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 Hausman) 대위와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츠(W. Roberts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형 집행 면제를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다. 


또한 백선엽은 육본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 밖에도 박정희의 구명에는 정일권(丁一權), 원용덕(元容德) 등 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군 내 만주 인맥들이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구명 노력의 결과, 박정희는 12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불구속 상태로 진행된 군사 재판은 이듬해 2월 8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정지 처분이 취해졌다. 그러나 형 집행은 면했지만 파면은 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2. 당시 남로당은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의지해 왔던 셋째 형이 광복 직후 미군 치하의 경찰 총에 죽은 이후였다.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은 미군정에 실망했고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형의 친구였던 이재복 목사가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으면서 박정희 대위를 끌어들였다. 미군정하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가 아닌 합법단체였다.”

-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으로"를 저술함.



3. 당시 남로당 숙청작업을 지휘했던 백선엽 장군의 증언 (좌빨들은 당시에 꼬꼬마라 이런 전후사정을 잘 모름, 혹은 알아도 조작과 선동을 일삼겠지..)


"사실 박정희 소령이 사형을 면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좌익의 발호를 부추겼던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태였지만, 실제 활동은 없었다.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이 주도한 조사 과정에서 이는 상세하게 드러났다."


"그때의 좌익이라는 것은 유행처럼 번지던 사조(思潮)이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에다가 빈곤과 무기력함이 판쳤던 세상에서 변혁(變革)을 바랐던 젊은이들이 한때 가슴에 품기 좋은 이념이기도 했다. 남로당은 그 점을 잘 활용했고, 박 소령은 그런 남로당의 포섭에 걸려든 경우였다."

- 백선엽 장군 회고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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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 CHOSUN 김*종 2013.11.04 17:06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른건 몰라도 미군정 시절에 민로당은 합법단체야 가족으로 인해 잠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친일행적이 없다고 판단되어 사형은 면한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TV CHOSUN 김*종 2013.11.04 17:0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글 못읽냐? 다읽고 감상문 써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TV CHOSUN 진*하 2013.11.04 17:02

    빨갱이로 사형위기에 처한 빨갱이가 빨갱이 색출에 협조라... 이게 무얼의미하는지는 다 알겠지..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배반의 장미가 떠 오르는군.. 기회주의자적 삶이란..

  • TV CHOSUN 김*종 2013.11.04 16:41

    미군정의 남로당은 합법적 단체였어 ㅋㅋㅋㅋㅋㅋ 이거 몰랐으면 지금이라도 공부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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