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지독한 나라사랑과 국민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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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박*영 조회수 87 |
거인 박정희의 지독한 국민사랑
1970년 11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색다른 대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전국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 대통령 박정희까지 참석한 객석엔 3천명이 넘는 각계대표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양복정장을 하고 있는 앞자리에, 유독 점퍼와, 스웨트차림으로 앉아있는 시골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농부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원고를 만지작거리며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자신의 성공사례를 발표할 차례가 돌아오자 그는 작정한듯 굳은 표정으로, 줄곳 만지작거리던 원고를 자리에 두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성공사례를 발표해야하는 그 원고는 지역공무원들이 며칠을 밤세워 써준 원고였고, 그내용은 사실과 다른 과장과 부풀림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저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입니다” 그는 공무원이 대신 써준 원고를 버리고, 꾸밈없이 자신의 가난탈출기와 자신만의 농법을 어눌하지만 진지하게 소개하였다.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이야기할때는 설움이 복받쳐 울먹이기도 했지만, 이농부의 진솔한 체험사례에 객석에선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 2층특별석에서 내려와 그 농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산증인입니다.”
그농부에게 산업훈장을 걸어준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으로 올라가, 비서가 준비해준 원고를 옆으로 밀치며 이야기한다. “여러분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 감명이 깊어, 오늘은 본인의 소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사용씨는 우리 농민들의 위대한 교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국민의 훌륭한 교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난을 ‘근면과 자조와 협동’으로 해결해 냈습니다. 우리농촌의 가난도 하사용씨와 같은 정신자세가 있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
한 농민의 원고 없는 진솔한 성공사례발표에, 박정희 대통령도 즉흥연설로 화답하였고, 이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은 자신이 그토록 고민해오던 5천년 우리농촌의 빈곤을 해결할수 있는 자신감과 방법을, 한 농부의 성공사례에서 운명처럼 발견한 것이었다.
그시절 ... 한국의 농촌을 아는가? 당시 남한의 농가는 250만 가구였다. 마을의 80%는 초가지붕이었고, 80%가 등잔불이었다. 수도는 고사하고 펌프도 없어, 두레박으로 퍼올린 우물물에 의존했고,
그나마 비가오면 빗물에 뿌옇게된 물을 식수로 사용할 때였다. 목이마른 어린아이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리다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우물에 빠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북한이 천리마운동으로 ‘이밥에 고기국’타령을 하고 있을때, 우리는 제사상에 올릴 달걀 두어 개를 구하러 온 동네를 찾아다녀야 할 정도로 척박하고 고단한 현실이었다.
북한이 ‘천삽뜨고 허리펴기 운동’을 가열차게 벌이고 있을때, 남한의 농촌은 그때까지 수백년 이어온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외신은 한국 농민들을 가리켜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기어다니는 동물」로 묘사했다. 실제 그대로였다.
아마도 70년대 한국 농촌은, 몇백년전 조선시대 어디서나 볼수 있었던, 지방고을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민속촌의 모습이, 바로 그 당시 농촌풍경이었다
5천년동안 숙명처럼, 등짝에 가난이란 짐을 짊어지고 살아온 한국의 농촌을, 기적처럼 변모시킨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이처럼 한 농부의 ‘소득증대 성공사례발표’에서 점화가 되었다. 71년 대통령의 기치아래 마침내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점화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1만6천개의 마을에 300여 포의 시멘트를 무조건 나누어 주었다.
마을을 위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말외에 어떤 지침도 조건도 없었다. 의외로 절반이 넘는 마을에서, 정부에서 준 시멘트로 우물가도 고치고, 빨래터도 바꾸며, 서서히 자발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t씩을 지원했다. 이번에는 마을주민의 참여도와 의욕에 따라, ‘자립마을, 자조마을, 기초마을’로 분류를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자연스레 이웃마을과 경쟁이 되자, 정부지원을 더 받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이장과 면장과 조합장등 지역유지들이 발벗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5천년동안 자물쇠에 꽁꽁 잠겨져있던 농촌의 분위기가, 점점 생동감으로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지게지고 겨우 다니던 농로는 경운기가 다닐수 있도록 만들고, 비가오면 자전거도 못끌고 나서던 마을앞 신작로는 버스가 들어올만큼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을길을 넓히기위해 땅 지주들은 기꺼이 자기땅을 희사하고, 주민들은 기꺼이 삽과 괭이와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2년에 한번씩, 동네 품앗이로 초가지붕 이엉질을했던 집들은 하나둘씩 알록달록 스레트와, 기와지붕으로 바뀌면서 농촌은 점점 흥이나고 신이났다. ‘지붕개량‘이란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새벽이면 수탉이 울기도전에 마을회관에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가 확성기를 타고 온마을의 기상나팔역할을 하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라는 새마을 노래는 마침내 수천년을 잠자고 있던 민초들의 어두운 의식을 일깨웠고, ’순종과 억압‘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왔던 농촌이, ’자율과 자조‘라는 신선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민초들의 신바람은,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뭉쳐졌다. 청년들은 4H를 조직하고,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밤새워 토론하고 동네를 위한 공동의 사업을 구상했다.
어른도 청년도, 그리고 부녀자들도 함께 참여하여, 마을회관은 자연스레 ‘민주주의 토론’의 실천도량이 되었다. ‘마을 민주주의’가 실천되면서 수천년 전통처럼 내려오던 가부장적 농촌의 모습도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빨래터, 놀이터, 우물개선, 변소개량등 생활개선에 중점이 맞춰지자 마침내 부녀자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남녀평등의 바탕위에 민주적인 역할분담을 인정하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게도 한참 뒤지고 있던 남한의 경제력은 75년을 기점으로 반전에 성공하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점점 탄력이 붙으면서, 60년대 수공업은 경공업중심으로 넘어가고, 마침내 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꿈에 그리던 중화학공업으로 경제의 틀을 바꿈으로서 국가백년대계의 경제플랜을 가동한다.
수출은 꿈도꾸지 못하던 시절에서, 불과 15년만에 수출100억불 달성한 것이 바로 77년이다. 세계는 한강의 기적을, 30년 또는 반세기만에 이루어냈다고 극찬을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강의 기적은 오로지 박정희 시대가 15년만에 이루어낸 기적인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 기적의, 중추이자 모태가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던 것이다.
농민도 기술자도 기업가도, 소음과 기름냄새가 진동하는 기계옆에서 비지땀을 흘리던 어린 여공까지, ‘우리도 할수있다’ ‘잘살아 보자’는 한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때는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가난한 민초들에게, 우리민족의 신바람 정신을 일깨워서, 스스로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느끼게 만든 그 지도력의 원천이 무엇일까? 별이 새겨진 제복에 짧은 지휘봉과 검은 썬그라스를 쓴 장군 박정희의 무섭고 두려운 카리스마인가?
힘없고 나약한 민초들에게 철권통치를 통해 억압과 굴종을 강요한 리더쉽인가? 아직도 인간박정희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부질없고 부질없다. 그것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리더쉽이자, 부드러우면서 순수한 심성이 발휘한 지도력이었다. 우리 민족성과 가장 가깝고 보편적인 사람, 늘 함께 부대껴온 이웃집 아저씨같은
전형적인 한국인. 박정희는 그런 대통령이면서 항상 이웃과 민초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진흙길과 가시밭길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선각자였다. 민초들과 함께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헤진 양말을 기워서 신었으며, 장마가 지면 수해를 걱정하고, 가뭄이들면 농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발사는 박대통령의 낡은 셔츠와,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구멍이 커진 낡은 가죽혁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그런 지도자였다.
새마을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핵심인사는 이런 박정희대통령을 보며 ‘국민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다. 혼돈의 대한민국을 구해내겠다는, 일념과 신념이 없었다면, 그가 목숨을 걸고 한강다리를 넘을수 있었을까?
수백명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혁명으로 최고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구중궁궐에 뭍혀, 호가호위했다면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 한강의 기적이 있었을까? 지도자의 결단과 소신은, 반드시 올바른 신념이 있어야 성공을 담보하는 법이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리콴유 싱가폴수상은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덩 샤오핑, 한국의 박 정희를 꼽고싶다고 회고하였다. 리콴유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했던 덩 샤오평 역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우리도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우자"며,
수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한국으로 새마을 연수를 보낼 정도였다. 세계의 지식인들과 경제학자들은 제 3세계국가가 선진국으로 올라설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바로 ‘박정희모델’을 제시하였다.
몇년전 중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중국의 덩 샤오핑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 덩샤오핑이 존경하는 인물로 박정희대통령을 꼽았다는 걸 몰랐을까? 박근혜가 단국대학교에서 했던 연설의 귀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맺음을 대신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하거나 새로 탄생한 나라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85개국입니다.그러면 이 85개국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가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딱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전쟁까지 겪고, 나라가 분단까지 되었지만, 전 세계에서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기적의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힘은 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그런데 왜 이렇게 취직 걱정을 해야 하고, 좌절을 겪어야만 합니까?
문제는 딱 하나, 결국 국가 리더십의 문제입니다. 국민들은 21세기에 맞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국가의 리더십이 이런 능력이 발휘 되도록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운/펌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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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2013.11.04 13:52
진선하씨 당신 부모나 당신 조상들의 업적이나 잘 살펴 보세요..
박*영 2013.11.04 13:37
진선하 그럼 왜 너희들은 독립운동 안하고 독립군 때려잡는 친일파가 왜 그렇게 많은가 이 뻔뻔한 빨갱이 종자야? 왜 너희들은 보국대하고 오장질 하고 면서기하고 조선인 조달하는 공급책하고 수탈에 앞장셨냐?답변 못할까? 박대통령 단순히 만주군 소위 한것은 친일파이고 ..조선악질 수탈에 앞장선 니들 개종자들은 생계형 친일이냐? ㅋㅋㅋㅋㅋㅋ
진*하 2013.11.04 13:32
나라가 침탈당해 암울했던 시기에 수많은 뜻있는 젊은이들은 조국독립위해 개인영달과 가족을 포기하고 독립군에 입대했을때... 그때 박정희 당신은 왜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지않고 애국심도 팽개친채 일본군에 입대하더니, 대통령이 된후에야 나라와 민족과 국민을 위하는체 하는 겁니까? 일제시대에 개인영달위해 독립군이아닌 일본군을 택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가요? 그래도 늦게나마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하고 국민과 민족을 사랑하는 모습의 기사를 보니 마음이 훈훈하네요. 분명 당신이 경제를 살린건 잘한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박*영 2013.11.04 13:14
진선하 이쩔뚝년아..제범이에게 전해라..도플갱어 ㅋㅋㅋ
진*하 2013.11.04 13:07
경제성장을 이룩한 부분은 그분의 거룩한 업적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 일생의 명과 암중 명에 속한 한부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