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속에 꽃핀 사랑 - 육영수와 박정희 1950년이 저물고 해가 바뀌면서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9사단은 강원도 내륙 쪽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통 통신이 엉망이고, 병사들은 대부분 보충대로 충원되었다. 포병 지원도 못받는 데다가 예비연대가 없어 교육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들을 바로 전투에 투입하다 보니 병력의 손실이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살을 에이는 혹한 속에서 산악전투를 수행하자니 실탄이나 포탄의 공급보다도 주먹밥 공급이 더 큰 문제였다. 전선에서 연기를 낼 수 없어 후방에서 만든 주먹밥을 나눠 먹었는데 밥이 땡땡 얼어서 차돌처럼 되어 있었다.
9사단은 2월 말에 이르기까지 영월, 춘양, 정선, 강릉 등지로 이동을 하며 전투를 벌였다. 사단에서는 큰 접전이 없어도 적의 포격으로 하루 평균 30 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어느날은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있자 사단장은 박정희 참모장에게 좋은 날이고 하면서 회식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자 박정희 참모장은 정색을 하고 "사단장님! 안됩니다. 한명도 전사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두 명밖에 전사하지 않았다고 축하하자는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사람의 부모는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플 겁니다." 하면서 단호히 반대했다.
그 무렵에 박정희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부임한 이용문 대령을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 대령은 6 25 때 서울을 탈출하여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고 그 때문에 진급도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친숙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서로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부인 육영수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두어 차례 9사단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전투지역 내에 여자가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육영수의 아리따운 자태와 고고한 품격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미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군데군데 헌병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지만 신부인 육영수가 전투지역을 드나드는데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어느날 송재천 중위가 박정희 참모장에게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하자 "그 사람 예까지 뭐하러 왔대" 하며 덤덤한 표정으로 부인을 맞이하기는 하였으나 두 사람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1951년 4월 15일 박정희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했다. 육영수는 남편의 진급소식도 알지 못한 채 강릉으로 찾아갔을 때 남편의 계급장에 태극휘장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을 보고 기뻐했다. 남편은 전투에 시달려 얼굴은 야위고 몸은 초췌해 있었으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마음 든든했다. 특히 그 무렵 육영수가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일선지역으로 남편을 찾아가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난리통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과 결혼하는 것을 나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아버지! 제가 선택한 분이니 허락해 주세요." "글쎄 절대 안 된대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남편에게 사고가 생기는 날이면 아버지를 쳐다 볼 면목도 없을뿐더러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것이니 저으기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천수만명의 전쟁사상자가 생기는 판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 무렵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행복했음을 엿볼 수 있다
== 춘삼월 소묘
1.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英)
2. 노송은 청청 정자는 우뚝 복숭아꽃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3. 거기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대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 날에 때가는 줄 모르나니
4.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 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희롱하네 우리도 노를 저며 누벼 볼거나 <1951년 4월 25일, 경포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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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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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 2013.10.31 23:02
잘 읽고 갑니다. 그분들이 행복한 백년회로를 하지 못함에 너무 가슴아픕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는 이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