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저격수다2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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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와 박정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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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1 신*호 조회수 131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초기의 선택권은 육영수에게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자 궁극적 주도권은 박정희에게 넘어갔던 것 같다.

육영수가 박정희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였다. 육영수는 훗날 박정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서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예요. 얼굴보다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라고 했다.

본래 육영수는 박정희를 만나기 직전 혼담이 오고가던 남자가 있었다. 남자 쪽에서 "서울 명륜동에 기와집도 사놓고 식모도 데려다 놓았으니 식을 올리자"고 서둘렀다고 한다. 그런데 육영수는 그런 조건보다 박정희의 뒷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육영수는 실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 보다는 로맨틱한 결혼관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요, 그같은 접근방법이 그들의 결혼관을 가능케 했다.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이 결혼의 성격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는데, 박정희와 육영수는 데이트가 거듭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박정희는 육영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아마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굳건한 태도와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박정희의 분위기가 육영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사랑이 무르익자, 육영수는 재봉틀을 돌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하도 이 노래를 자주 해서 집안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알 정도가 되었다. 그 만큼 육영수는 박정희를 사랑했다.

검푸른 숲 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 설레어라 /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육영수와의 만남은 박정희에게 그 동안의 정체성 위기와 많은 고통을 한꺼번에 보상해 주었다. 특히 육영수는 자신을 자제할 줄 알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육영수는 남편을 '여보', '당신' '**아빠' 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드세요", "저 좀 보세요" 라고 부를 정도로 수줍어 하며 조심스럽게 대했고, 박정희 앞에서는 마치 남 앞에 나서는 것처럼 옷맵시에 마음을 쓰고 절대 맨 발이 보이지 않도록 반드시 버선을 신을 정도였다. 또한 육영수는 박정희를 위해 따뜻한 물을 세수 대야에 받쳐들고 마루에 서 있기도 햇으며,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도 남편을 너무 어려워하는 것으로 느낄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 이렇듯 육영수는 박정희를 전통적 방식으로 사랑했으며,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지는 박정희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리고 겉으로는 육영수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영수에 의존하게 되었다.

밤은 깊어만 갈수록 고요해지는군/ 대리석 같이 하얀 피부
복욱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을 뿜는 듯한 그 얼굴
......(중략).......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굴 더욱 예쁘고
평화의 상징! 사랑의 권화여!
아, 그대의 그 눈, 그 귀, 그 코, 그 입
그대는 인과 자와 선의 세 가닥 실로서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
진저
.........(중략).........
나의 모든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착되어/ 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되고 완성
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써/ 인생 코스가 되어 주오
.....(생략)........


이 시는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란 제목이 붙은 시로 1952년 7월 2일 밤에 쓴 것이다. 부산정치파동의 소용돌이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이다. 이 시를 보면, 박정희는 아내에게 성스러운 이미지를 부여하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그녀를 통해 완성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인생코스가 되어 달라고 한다. 즉, 박정희는 육영수가 자신을 위한 목욕물을 데우느라 방안에 연기가 스며들자, "온 집안에 웬 연기야. 메워 못 살겠군. 목욕이고 뭐고 그만둬요." 라고 말하기도 햇을 정도로 퉁명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내를 어머니 처럼 또는 여신처럼 대했다. 또한 육영수는 박정희가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려도 생글생글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햇다고 한다.

육영수는 경제적인 관념에서도 자신의 출신 가정을 따르지 않고 박정희의 수입에 맞는 생활을 했다. 가난한 사람살이 가운데서도 분식과 혼식을 일상화하고, 콩나물밥이나 콩나물죽으로 손님을 대접하며 늘 가계부를 적는 등 검소한 생활 태도를 유지햇다. 1950년 말 두 사람이 결혼한 이후 1958년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는 전셋집을 전전했으며, 그런 경우에도 지혜롭게 처신했다. 또한 당시 육군 장성들은 부하 사병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지만, 박정희와 육영수 모두는 그런 특권을 남용하려 들지 않았다.

요컨대, 두 사람은 신분적 차이가 있었지만, 일단 결혼에 이르자 서로 잘 맞는 반려자였다. 특히, 육영수는 박정희의 고아의식이 완벽하게 치유할 수 있는 모성애를 간직한 여인이었다. 반면 박정희는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에 버금가는 신념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영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출처]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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