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데모쟁이들도 열등의식을 거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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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 장* 조회수 103 |
실제 했던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 봤으면 싶다, 오늘도 도서실 다녀 왔는데 데모쟁이 출신자가 쓴 현대사 책이 있더라구 어처구니 없어 자세힌 안보고 대충만 봤는데, 곳곳에 그들이 박정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이 배어 있더라, 하긴 서울대 출신 영삼시는 재임기간중 나라를 부도내 숱하게 많은 국민들을 죽음이나 이혼으로 몰아 갔고, 그뒤 대중, 무현씨는 말하기도 창피해 쓰고 싶지도 않은정도이니 인격형성이 미숙한 그들이 박정희에 대해 얼마만큼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을지 안 들어 봐도 짐작이 간다 할것이다,
허나 그럼 못쓴다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큰업적을 남기신 성군이라는 세종도 당시 선비들의 열등의식을 극복 못해 오점을 남긴일이 있으셨다, 그게 장영실 관련 건인데 다알다 싶이 장영실을 내친 사건은 세종이 타는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거 였다<어디엔 다리중 하나가 부러져 가마가 기우뚱 했기 때문이라 하고, 어느책에선 가마 앞에 있는 장식물인 용상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 하니 정확한 내용은 알수 없지만 아무튼 가마 부실제작이 원인 이었음은 맞는듯하다>, 이사건으로 평소 자기들보다 못한 출신성분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승승 장구하던 장영실에 대해 열등의식을 가지고 지내던 사대부님들께서 장영실을 사형 시킬것을 간한다, 타협끝에 장영실에게 곤장 백대를 친후 궁에서 쫓아 내는것으로 1차 결론이 났는데 그때 장영실을 아끼던 세종이 해줄수 있는 최대의 선처는 100대를 80대로 줄여 준것 뿐이엇다ㅡ, 이후 장영실은 80대의 곤장을 맞고 궁에서 쫒겨 났는데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단다, 장독으로 죽었는지 국가와 세종에 대해 원망 하면서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다가 광인상태에서 객사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장영실이 기록에 나오는건 태종때 부터 아니었던가, 당시 관비 였던 영실은 여타 노비들관 확실히 달랐다, 다른이들은 일과에 지쳐 주어진 일만 끝내고 들어 누워 자거나 친구들끼리 잡담 하는게 고작 이었는데 영실은 주어진 일과 후에도 집기 비품등이 들어 있는 창고를 얼마나 잘 정리 했던지 그일로 실록에 기재 되었던거다, 이렇듯 성실함이 몸에 배어있던 영실이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리가 없었다는게 본인 판단이다,
누군가 잘난이가 있으면 그보다 더나은 업적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을 해야지 이처럼 질투에 근거한 모함이나 하면서 욕하면 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격수다 좋더라, 영웅은 하늘에서 내는거다, 박정희 정도 되는 인물 앞으로 백년내엔 안 나올것이다, 이제 부터라도 업적을 제대로 알려 후세에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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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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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 2013.10.27 19:05
어제 오늘 우울한 기분입니다....마음이 슬픔니다...왠지 아시겠지요? 장덕님....빗물이 시냇물 을 만들고 시냇물이 강물을 만들고 강물이 바다를 만들듯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살맛나는 나라 를 만들어요...편안한 저녁시간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