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정말 더럽고 간교한 인간성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껏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매우 혐오해 온 게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적어도 저 가증스런 궤변의 달인 노무현처럼 그저 입만 살아 한몫 보려고 하는 그런 저급한 부류의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나는 그래도 김대중씨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은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씨가 아무리 여러 실정을 저질렀어도 그래도 저 노무현씨보다는 훨씬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경우는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물론 대선 때 그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과거 5공 청문회 이후 국민 일반에게 남아 있던 그의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가 대선이 종료되고 당선자로 남아 있던 당시까지만 해도, 결과야 어찌 됐든 간에 이왕에 노무현씨가 대권을 잡았으니 그가 국민 앞에 약속한 바대로 선정을 펼쳐 나감으로써 조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역사에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그 스스로 국민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그 수를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일련의, 전혀 일국의 지도자답지 못한 저급한 언동과 기회주의적인 간교한 행태들은, 국민들의 그러한 소박한 기대를 무참히 꺽고 참담한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능력과 자질, 그리고 전문성을 최우선의 자격요건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 국가기관의 요직마다, 그러한 필수적 자격요건은 모조리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과 소위 코드가 맞느냐, 안 맞느냐 라는 지극히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기준만을 적용, 구 재야 운동권 출신의 좌파적 성향이 농후한 자들만 골라 배치하는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정당한 비판을 가하는 신문사들은 모조리 싸잡아 소위 찌라시로 매도하면서, 그저 언어도단적인 아부성 저질기사 쓰기로 일관하는 언론만이 마치 참된 민주언론인 양 호도해 대는 등 그 자신이야말로 지극히 반민주적이고 제왕적 사고에 젖어 있는 모순된 인간임을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대한 盧 정권의 탄압은 과거 군사정권의 동아일보(東亞日報)에 대한 탄압보다 훨씬 더 야비하고 잔인하다. 군사정권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및 보안사 등 막강한 실세를 자랑하던 권력기관들을 총동원해 자행했던 언론탄압은 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오히려 순진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자신의 교활한 선동전술에 의해 철저히 오도된 일부국민들을 교묘히 선동, 일개 언론사를 완전히 고사(枯死)시켜 버리겠다는 악랄한 음모를 획책하면서 자신의 홍위병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의 실행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열한 여론독재의 전형이라 하겠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지금 국가경제가 파탄일로로 치달으면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자살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서민들이 연일 수십명을 상회하고 있는데도,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자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동정의 기색도 추호의 연민의 정도 찾아 볼 수가 없고 오로지 코드식구들과 희희낙락거리며 연일 샴페인이나 터뜨리며 샥스핀 파티에나 열중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들을 목도한 국민들이 격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의 방약무인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 주는, "내가 대통령인데 니들이 뭔 참견이냐?"라는 제목의 도저히 눈 뜨고는 봐줄 수 없는 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저질 드라마는 물론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국민에게 채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5년 짜리 장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을, 그것도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의 의사(意思)로 야기해, 막대한 국력낭비를 초래한 중대한 과오에 대해서도 그는 국가원수로서 반성은 고사하고 또다시 극단적 이분법으로 국민을 이간질해 댈 구실은 어디 또 없는가 하고 마치 썩은 고기를 찾아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그의 시선은 늘 그렇게 본 궤도를 벗어나 그 주변의 미로를 겉돌고 있다.
즉 지도자로서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마치 올림픽 결승의 무대에 오른 궁사와도 같이, 그런 진지한 마음자세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결코 한 순간도 시선을 흩뜨리지 말고 굳건히 겨냥하고 있어야 할 국정의 핵심 타깃은 우습게 내던져 버리고, 그저 자기자신과 자신의 코드종자들만을 위해 어떻게든지 국가를 분열시키고 국민을 이간질해 댐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반사이득, 곧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미보기"에만 혈안이 돼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말이다.
대통령이 국가를 운영해 나감에 있어 맹목적인 권위주의에만 의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더십의 필수불가결의 구성요소인 권위라는 덕목까지 폄훼하거나 배격하려 들면 안된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말은 곧 국정의 지표가 되는 바, 이의 원활한 실행을 위해서는 필히 그 말에는 령(令)이 제대로 서 있어야 하고, 그 령(令)이 올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바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에서 나오는 진중함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힘, 곧 경건한 카리스마를 필요로 한다. 한데 바로 이 카리스마를 제공하는 근본적 동인이 바로 권위인 것이다. 이렇듯 권위는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지만 결코 아무나 그런 자질을 가질 수는 없다. 그만한 인품과 식견을 가진 자라야만 구비가 가능한 것이다. 盧統이 줄곧 왜 그토록 탈권위를 강조해 왔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수평적 리더십을 떠들며 링컨, 드골 등 세계적 지도자들과 자신을 감히 동일시하려 드는 행태도 다 자신의 그런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의 발현일 뿐이다.
지금 노태우나 전두환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두고 위대한 지도자 운운하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인물은 유독 그가 사망한 지 어느덧 35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며 사상 초유의 강력한 신드롬까지 유발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해답은 자명하다. 바로 박정희의 사후 그 누구도, 결코 그를 뛰어넘어 보거나 적어도 그의 발 뒤꿈치 수준에라도 도달해 본 지도자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이른 바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해 왔던 그 민주화가 이 땅에 실현되면서 찾아 온, 무려 3회에 달하는 문민정권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은, 세상의 정의란 정의는 모두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양 거들먹거리며 기고만장해 있던 그 민주투사라는 자들의, 과거 군사정권 시절보다도 더 더럽고 사악한 온갖 부정과 부패를 직접 목도하게 되면서, 거기서 받은 충격과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비록 독재자라는 오명을 써 오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 누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거인,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향수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고인(故人)을 부관참시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바로 민주화 운동권 세력이니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재야 운동권 세력들로 구성된 일련의 정권들의 그러한 도덕적 헤게모니의 상실 이외에도, 알량한 좌파 편향정책으로 말미암은 국가 정체성의 혼란 야기 및 사회불안 요인의 급증, 그리고 그에 따른 국가신인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제의 파탄 양상도 크게 일조했다고 사료된다. 다시 말해 민주화 운동권 세력들의 3회나 연속되는 집권 이후에 나타난 연이은 실정(失政)과 부패, 도덕성 실추, 경제적 실패 등의 참담한 성적표는 바로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 청렴성, 자기 희생, 경제성장의 업적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폭제가 되어 준 것이니 이는 자업자득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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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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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애 2013.10.21 16:48
부끄럼은 아는지 스스로 벙이바우에서 다이빙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