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매체들도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婚外) 자식 문제를 보는 시각이 반반으로 나뉘는 것 같다. 오늘자 중앙일보 칼럼에 ‘사생활이 요격 미사일인가’ 라는 제하(題下)의 기사를 올려놓고 독자들 시선을 끌고 있다. 다분히 처음 보도한 조선을 겨냥한 것과, 덧붙여 누리 꾼의 SNS상 무차별적 폭로에 대해 다소 짜증이 묻어있다. 사생활에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잔인 한가 라고 풍기는 뉘앙스가 검찰총장 그만 좀 괴롭혀라 는 식의 논조(論調)니 말이다.
칼럼은 또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과 관련이 있든 없든, "전쟁이 나도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얼굴 없는 손들은 죄의식마저 잃은 것인가"라며 이번 사건을 보도한 언론, 네티즌 모두를 부도덕하게 폄하하고 있다. 의혹과 관련이 있든, 없든 혼외 자식을 위해서라도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법정의 판사같이 훈계하는 것이 가소롭기도 하고 실실 웃음이 나온다. 왜나면, 불과 얼마 전에 민주당 대변인이었든 ‘차영’씨는 친자의 문제가 얽혀 자칫 자식에게 미칠 영향을 뭉개 버리고 용감하게 친자 확인 소송을 한 사건이 있었잖은가.
그때, 본 기사를 쓴 칼럼리스트는 그 ‘차영’을 향한 ‘비정의 모정(母情)’이라는 글로 반박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며, 혼외 자식 문제로 주홍글씨를 달고 다녔던 전직 대통령 DJ와 YS 때에도 이렇게 관대 했는지 묻게 된다. 물론 자라나는 아이를 보호하여 조심스러워야 된다는 말엔 동의를 한다.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폭로 댓글도 인정 하지만 사건의 실체는 그 아이가 아닌 어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 진위 여부가 이번 사건의 요체며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하는 것이고 당사자는 이 나라 공권력의 수장(首長)이니 그렇다.
그 필자는 심지어 지금 한국 사회가 야만 상태로 곤두박질 정도로 문명이 존재하는가. 라고 엄청 큰 고민의 흔적도 내 비쳤다. 인터넷, SNS의 문화가 안겨주는 부정적 측면을 특정 사안에 등식으로 끼워 맞추려는 의도가 칼럼에 잔잔하게 깔려 있음을 본인만 모르는 것일까. 그는 또 공인의 사생활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지, 무엇이 공익인지에 관한 오랜 논쟁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여, 논점과 주제가 엉뚱하다. 인터넷 문화의 폐해(弊害)가 검찰총장 사건에 국한된 것처럼 벤치마킹하는 것이 가살스럽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각각 다른 시각의 두 변호사가 말 한 것을 인용했다. “혼외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검찰총장 직무와 무슨 상관이냐. 채 총장 부인과 고등학생 딸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 는 주장과 “검찰 수사를 지휘하는 총장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공직 생활은 절대 사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는 상반된 견해가 그것이다. 일견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어 보이나, 전자(前者)의 경우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혼외 자식 문제는 검찰총장의 직무와 무슨 상관이냐고? 한 변호사에게 딱 하나만 질문하고 싶다.
과거 윤창중 사건의 성추행 사건도 청와대 대변인 직무와 상관이 있었냐고 말이다. 윤창중사건도 이 자들의 지론대로라면 피해 여성의 장래를 생각해서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윤창중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기사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당신들은 한 달 가량 씹고 또 씹어 박근혜 정부에 먹칠을 한 장본인들 아닌가? 하나는 성추행이고, 하나는 서로 사랑하여 저지른 불륜으로 볼 수 있다고, 잡아떼고 싶겠지. 어쨌거나 이번 채동욱 혼외 자식 문제는 아직은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의혹일 뿐이다. 이 사건의 해결은 주먹을 내민 검찰총장이다. 그 주먹을 덮을 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칼럼의 말미(末尾)에, ‘세금 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정원 개입설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는 적시(摘示)한 내용이 영 켕기지 않는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며느리가 더 얄밉다는 우리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인터넷의 홍위병들이 두렵다며 겁에 질린 듯한 제스처도 역겹다. 하수(下水)들의 엄살 같고 틈새를 교묘히 비집고 들어와 간 혹 염장을 질러 되는 문재인의 훈수 같은 칼럼을 읽고 개운치 않아 한마디 뱉고 간다. <펌글> |
댓글 0
댓글등록 안내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