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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탈을 쓴 늑대 위만의 도적떼와 김정은의 도적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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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5윤복현 조회수 406


도적떼 두목 위만에 속아 나라를 강탈당한 기자조선의 기준왕


만약 기준왕이 위만을 강도 도적으로 분별하고 몰아 냈다면

단군한국의 서토였던 요서지역을 지켜낼 수가 있었다! 당시

단군한국의 중앙국인 진한을 계승한 북부여 해모수(고추모 할아버지)는

위만은 도적떼이니 기준왕에게 받아 들이지 말고 물리치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단군왕검의 피가 흐르는 성혈족은 사람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그 자가 선한 자인지 도적인지 사기꾼인지 강도인지 관상으로 아는 거다!


북괴도적떼 역시 최종 목적은 자유대한민국 강탈에 있음을 알라!


이를 명확히 인지못하고 방관했다가는 결국 도적떼에게 먹히고 만다!



[민족사 자료]



도적떼 두목 위만에 속아 나라를 강탈당한 기자조선의 기준왕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 북부여기>는 단군한국의 정통성을 잇는 북부여는 위만과 우거를 국가가 아닌 도적집단으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기준은 엄연히 번조선의 왕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는 위만/우거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북부여는 위만을 도적집단으로 불러 ‘토벌’과 ‘침략’이란 용어를 쓴다. 








▲   민족사에 무지한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위만조선에 대한 설명.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이래가지고서야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인용)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 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0,000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발동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 끝)

우리 사학계가 치켜세우는 위만조선은 3대에 걸쳐 겨우 약 90년 동안 존재했던 도둑집단일 뿐이다. 위만과 우거가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라의 체제나 제대로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교역으로 실력을 배양했고, 이렇게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광고의 말을 믿어야할지....  이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위와 같이 우리나라 식민사학계는 단군은 신화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직도 철저한 반도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천황을 섬기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족사학계는 <한단고기>를 인용해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 옳을까???

▲  아직도 단군을 신화라고 알리고 있으며, 위만조선을 찬양하고 심지어는 고조선의 건국년도인 B.C2333년까지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정부는 수십원억을 지원하고 있다. 참으로 정신나간 나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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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일본) 시조로 제사지낸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동명성왕)에 의한 쿠데타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고두막은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에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동명국을 세우고 즉위한다. 한나라가 4군을 세우고저 사방에서 침략함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B.C 97년 10월 동명국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여기서 옮겨 가시오”라 하니 고우루단제가 매우 곤란해 했다.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했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어 즉위하였는데  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B.C 87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해부루왕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忿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마침내 해부루왕은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단군한국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대 왕력


위와 같이 동명국왕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쓰러뜨린 행위는 확실한 쿠데타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고두막한은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해부루를 분릉으로 옮기고는 도성에 들어와 국호를 쓰는데, 왜 그는 종전에 쓰던 ‘동명국’을 버리고 ‘북부여’라 칭했을까?

그 이유는 북부여가 위대한 대제국 단군조선의 적통을 계승한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지 않았다면, 고두막한이 굳이 해부루를 쫓아내고 자기가 쓰던 국호(동명국)까지 버리면서까지 북부여란 국호 사용에 집착을 했겠는가?

북부여란 국호를 강제로 빼앗은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등극한다. <한단고기 북부여기>에는 고두막의 재위기간이 이원화 되어 있다. 재위(在位) 22년은 고두막한이 동명국의 왕으로 있었던 기간이고, 재제위(在帝位) 27년은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단제였던 기간이다.

강력했던 고두막단제가 붕어하자 태자인 고무서 단군이 등극한다. B.C 58년 고무서단군이 재위 2년 만에 붕어하면서 사위였던 고주몽더러 대통을 이으라고 유언하여 23세의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이 분이 바로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시는 고추모(주몽)이다.

이렇듯 분명히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또한 도적 위만과 우거가 활동할 때 분명 어엿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북부여는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연결된다. 역사가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북부여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부여의 역사를 지워버린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신화로 만든 일제와 같은 종자가 아니겠는가!!!  


▲  주몽의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즉위를 <한단고기>는 B.C 58년이라 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B.C 37년은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단고기>에는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는 고구려의 건국을 B.C 37년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두 종의 사서가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서로 다르게 적었다고 해서 한 사서가 위서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고 본다.

필자는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이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 사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제로 등극한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으로 본 것이고, 한 사서는 북부여에서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년도인 B.C 37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는 차이일 뿐이다. 즉 견해의 차이일 뿐이다.

<한단고기 삼성기전>에 기록되어 있기를, “B.C 58년 봄 정월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주몽)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년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자체 년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한단고기>는 고구려 황제들의 연호를 몇 개 언급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주몽 성제(聖帝)가 사용한 ‘다물’이라는 년호이다. (고구려 황제들의 자체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종합해서 별도의 글을 올리기로 한다.)

참고로 <한단고기>의 고주몽 성제(聖帝)를 <삼국사기>에서는‘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고 있으며, <고구려 사초.략>에서는 추모대제(芻牟大帝)라 쓰며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체 년호를 사용한 어엿한 황제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이란 왕명으로 위장하나, 이는 정식 황명(皇名)이 아니라 자체 년호였음이 남당 박창화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 의해 밝혀진다.

1세 추모대제는 ‘동명(東明)’이란 년호를, 2세 광명(光明)대제는 ‘유리광명(琉璃光明)’이란 년호를, 3세 대무신제는 ‘대무(大武)’라는 년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또는 아마 조선왕조?)이 왕명을 기막히게 작명해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남당 유고집 <고구려사초.략> 청송 김성겸선생 번역

이처럼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에서 발생했던 쿠데타를 돌이켜 보면, 정변을 일으킨 자가 제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던 것이 고구려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동부여의 건국과 쿠데타와 멸망

참고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동생인 해부루는 고두막단군에 의해 B.C 86년 동쪽으로 옮겨와 가섭원(동)부여를 세워 39년간 통치한다. <한단고기>에는 이어 2세 금와(41년)--> 3세 대소(28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대소왕은 A.D 22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음을 당한다. 

대소의 죽음에 대한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도 내용과 년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대소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동부여는 당시 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단고기>는 동부여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고, <삼국사기>는 동부여가 대소가 전사한 해와 같은 해 결국 항복한 것으로 적어 놓았으나 그 이후에도 부여 관련 기록이 몇 개 있어 그 기록이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명대제 33년 (A.D 14년)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보위에 섰다. 즉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불은 A.D 32년 전쟁 중에 전사하고 이어 여왕 고야가  통치하다, A.D 51년 고구려 대무신왕 때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부루-->금와-->대소-->고야를 거치면서 4대 110년을 이어오다가 나라의 문이 닫혔으며, 중간에 대불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다고 적어 놓았다. 대소왕의 동생은 “갈사(曷思)‘라는 나라를 세우나 3세 47년 만에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사라는 나라는 동부여에서 갈라져 나간 지류(支流)로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에 동부여 정벌에 대해 상세히 나오고 왕대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동부여의 가지인 갈사까지 언급하면서도, 북부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단고기>의 내용대로 “B.C 58년 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KBS 사극 '바람의 나라'에서 동부여의 3대 대소왕으로 분한 한진희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를 한번 언급하고 있다. “유리명왕 29년(A.D 10년)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더불어 떼지어 싸워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빛이니 북부여(北夫餘)가 파멸될 징조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같은 년도에 같은 기록이 있으면서 “오지인이 대소(동부여)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여라고 언급하면서 북부여 이야기는 전혀 없고 동부여 이야기만 적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북부여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사관(史官)들이 분명 북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리왕 29년의 <삼국사기> 기록은 누군가가 확실히 조작한 기록으로 보인다. 또는 부여(동부여)의 북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북부여라는 나라는 있었으나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즉 고구려와 북부여는 같은 나라로 서로 공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단고기>의 B.C 58년 고구려 건국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위서인가?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우리 민족의 성서인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지 두고 보기로 한다. 본 글은 북부여와 관계된 글이기에 <한단고기>의 일부인 <북부여기>가 과연 위서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정본 한단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 부여기의 저자는 휴애거사 범세동장(休崖居士 范世東)선생으로 일명 범장(范樟)이라고도 한다. 범세동선생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의하여 실존인물임이 증빙되었고, 대동보에 “북부여기 약초(略抄)”가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기 실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
휘(諱) 세동(世東), 호(號) 휴애(休崖) 또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汝明)이다. 선조가 금성인(錦城人)으로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 말기의 대학자이다. <한단고기>에 합본된 <북부여기 상, 하>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하였고,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편집화해사전(編輯華海師 全)을 편찬하였다.

일찌기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義大夫)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광주직할시 광산구 덕림동에 묘소가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祠宇, 龍湖齊)가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국가만세에 마땅히 범세동 선생과 운곡 선생의 말을 쫓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에 이르기를, 행촌(杏村) 이암선생(단군세기 저자)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가서 태소암(太素庵)에 기거할 즈음에 한 거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소전(素佺)이었다. 그는 많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같이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옛 한단시대(桓檀時代)로부터 전수된 진결(眞訣)이다.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이여!
이렇듯 엄연한 실존 인물이었고, 범세동선생이 <북부여기>를 저술했다고 금성 범씨 대동보에 명확히 실려 있거늘 어떻게 <한단고기>를 함부로 위서라고  말하는가!!!  금성 범씨 대종회에 가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 만일 그 앞에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군세기>를 저술하신 이암선생과 <태백일사>를 편찬하신 이맥선생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고성 이씨 문중에 가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하면 거기서도 몰매 맞아 죽을 것이다.  

▲  금성 범씨 4세인 범세동(장)선생의 기록. 이런 분이 가공의 인물일 수는 없다.
▲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려 있는 <북부여기>에 관련 내용. 오른쪽에 퇴계 이황의 말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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