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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통해 국군복장한 북괴군이 전국에 출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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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윤복현 조회수 595



지난 대선 당시에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민심이 만든


대선후보로서 민심을 위반하고 문죄인에게 양보해 버린


나머지 이용당하고 나서야 정신차려 국민의당 차렸지만,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딧어요?라던 순진한 안철수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꿈꾸다는데, 안철수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자료를 게재합니다. 참고로 주체사상 만든


고위급 탈북자인 황장엽씨 증언에 따르면 대남통전부가


종으로 부리는 종북간자 수가 5만이 넘는다고 했다.


그것도 권력 깊숙이까지 암약하고 있다고 했으며,


최근 김정은은 여야를 떠나 정치권 핵심을 장악하고


헌법재판소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대남통전부에


내린 바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관광하러 나온


중국 동포들을 통하여 지형지물을 알아 오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러한 김정은의 지시내용을 보면


정치권이나 사법부 내부에는 종북 간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전국 곳곳서


땅굴징후들이 나와도 땅굴없다는 세력은 종북간자들이다!


[안보의식 자료]우씨4형제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


초리골에서 만난 주민들에 따르면 우씨4형제 중 한 명이 얼마 전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안타깝게도 지난해 이 무렵 지병인 당뇨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故우철제(당시 21세)씨입니다.


비록 그를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순 없었지만, 마을에 우철제 씨의 친동생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요. 우 씨의 동생은 45년 전 사건이 있던 삼봉산 아래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이장 우민제(62)씨입니다.

3년째 법원4리 이장을 맡고 있는 우 씨는 중학교 3학년이던 그날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는데요. 탁 트인 창으로 보이는 삼봉산(우씨4형제가 감금됐던 곳)을 배경으로 1968년 1월 19일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무가 유일한 생존수단이었어요. 나무를 해서 시장에 팔고 그렇게 살던 시절이죠. 그날도 평소 때처럼 나무를 하러 마을 뒷산인 삼봉산에 올랐다가 공비들을 보게 된 겁니다.”

무장공비(김신조) 숙영지가 있는 삼봉산 아래 초리골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초리골 삼봉산 아래에는 우씨 집성촌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우민제 이장도 나무하러 가던 멤버 중 한 명으로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형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심 이후 4명의 우씨 집안 형제들만 집을 나섰는데요. 그들이 바로 무장공비들과 조우한 ‘우씨4형제’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희제(30)씨와 우경제(22)씨는 서로 형제고, 우철제(21)씨와 우성제(20)씨는 6촌간으로 현재 우경제(인천 거주)씨와 우성제(일산 거주)씨만 생존해 있다고 하네요.

이들 가운데 공비들에게 가장 먼저 붙잡힌 사람은 우민제 이장의 친형인 우철제 씨입니다. 우성제 씨와 한 조를 이뤄 먼저 산에 오른 우철제 씨는 우성제 씨보다 위쪽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는데요. 갑자기 국군복을 입고 총을 멘 남자 5명이 그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어이 동무! 좀 쉬었다 하라우.”

그들은 우 씨에게 말을 걸더니 순식간에 포위하듯 둘러쌌답니다. 그리고 잠시 앉아 함께 쉬더니 왜 혼자냐고 물었다는데요. 알고 보니 마을에서 우성제 씨와 함께 올라오는 걸 지켜봤던 겁니다.

직감에 간첩임을 알아차린 우철제 씨. 하지만 그들의 지시로 땅에 누운 채 우성제 씨를 부르게 됩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우성제 씨가 아래쪽에서 올라왔고, 두 사람은 공비들에 의해 바위 쪽으로 향하는데요. 그곳에는 국군 복장을 한 병력이 더욱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우경제 씨와 우희제 씨도 공비들에게 차례로 납치되고, 우씨4형제는 바위 밑에 한데 모여 두려움의 시간을 보냅니다.

김신조 일당이 우씨4형제를 감금했던 곳

무장공비들은 우씨 형제들을 감금하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재밌게도 ‘감금’이라는 단어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고 하는데요.

공비들은 누더기 옷을 입은 형제들이 처량해 보였는지 직접 가져온 알코올램프로 마른 오징어를 구워서 주는가 하면, 일제 시계까지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또, 일주일 후면 적화통일이 되는데 북한에 오면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는 등 계속 자신들을 과시했다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날이 어두워지자 우씨 형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 공비들 간의 생각이 나눠졌다는데요. 결국 모의 끝에 살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해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들은 왜 위험을 감수하고도 형제들을 그냥 놓아줬을까요.

추후 김신조가 쓴 책과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공비들 간의 투표 끝에 살리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엔 시신을 처리하려면 매장을 해야 하는데, 얼어붙은 땅을 파기 힘들어 보내줬다는 이유도 있다는군요.

반면, 동정심도 크게 작용했다는데요. 우민제 이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형제들이 나무를 팔아야 늙은 부모님을 모실 수 있다. 우리가 아니면 가족들 다 굶어죽는다는 등 불쌍한 척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임기응변으로 감정에 호소한 게 풀려나는데 큰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씨4형제' 중 故우철제 씨의 동생 우민제(62) 법원4리 이장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우씨4형제는 오후 6시경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게 됩니다.

빈 지게를 지고 내려온 것을 이상히 여긴 가족들은 왜 늦었냐고 추궁했다는데요. 처음엔 신고하지 말라는 공비들의 말에 겁을 먹어 너구리를 쫓다가 굴속에 들어갔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군요.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실을 고하게 되는데요.

“등잔불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형이 수저를 떠는 거예요. 아버지가 막 야단을 치니 그제야 간첩을 봤다고 털어놨어요. 그래서 나머지 형제를 모두 오라 해서 제가 집마다 뛰어가 불러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1.21 사태 당시 생포된 김신조

사실을 확인한 어른들은 마을에 유일하게 전화기가 있는 집에 가서 파출소에 신고를 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다음날 숙영지의 증거물품을 찾은 뒤에야 전 군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네요. 그리고 신고 이틀 만인 21일 서울에서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그 후 우씨4형제는 내무부장관 표창과 정부 및 경기도에서 주는 포상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인천의 한 기업에 취업을 시켜주고 2층짜리 연립주택을 주는 등 당시 나무꾼이던 청년들에게 여러 혜택을 줬다는데요. 이 가운데 우경제 씨만 인천에 남아 계속 살고, 우희제 씨와 우철제 씨는 고향에 다시 돌아와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우성제 씨의 경우는 인천 쪽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군 제대 후 경찰이 돼 정년퇴임하기 전까지 고향인 파주에서 공직생활을 했었다는군요.

한편, 우민제 이장은 경기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는데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80년대 초부터 저희 동네를 안보교육 체험장이라 해서 초등학생부터 공무원까지 1년에 1,000명이 넘게 오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런 게 다 없어졌어요. 이곳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 우리 군과 안보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만큼 김신조 숙영지와 연계한 안보교육 체험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김신조 목사의 기념관과 우씨4형제의 얼을 기릴 수 있는 문화공간도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오늘로 ‘1.21 사태’ 45주년이 됐는데요. 1968년 1월. 우씨4형제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안보의식을 다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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