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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소감

[20'S TV조선] 강적들과 함께 영화 '암살' 속 인물들을 파헤쳐보자

조*철 2015.09.10

안녕하세요. TV조선 미디어챌린저 푸른달입니다.

이번에 제가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주제는 바로 '암살'입니다.

영화 '암살'이 큰 흥행을 하면서 역사적 사실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강적들 94화 에서도 영화 '암살'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떠한 내용들을 다루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암살'은 2015년 7월 22일 개봉하여

(9월 9일기준) 12,500,000 명 이상을 동원한 영화입니다.​

전지현, 하정우, 이정재, 오달수등 연기파 배우들과

최동훈 감독의 연출이 더해져 올 여름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1933년 조국이 사라진 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측에 노출되지 않은 세 명을 암살작전에 지목한다.
한국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 폭탄 전문가 황덕삼!
김구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은 이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암살단의 타깃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
한편, 누군가에게 거액의 의뢰를 받은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암살단의 뒤를 쫓는데...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이들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펼쳐진다!​







이제부터 '강적들'에서 다루어 졌던

영화 '암살'로 본 친일파와 독립투사들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무정'의 작가로 잘 알고있는 이광수 시인은

조선의 3대 천재로 1920년대 널리 이름을 알린 소설가였습니다.

이광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사 사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를 바꿔버린 사건이(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로 바뀌게된 사건)

바로 '수양동호회'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광수는 투옥되고 이광수를 따르던 안창호가 죽게되자,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친일을 하게됩니다.

광복 후,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넘겨져 대판을 받게되는데,

거기에서의 발언이 참 어이가 없습니다.

"내가 친일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내가 친일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 라며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후 북한으로 납북되어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됩니다.

이광수의 행적을 보면 우리가 왜 분노하는지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최남선' 입니다.

그는 적극적인 독립운동가 였습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하고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문인으로 문학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시조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최초의 시조집인 <백발번뇌>를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내면서

만주에서 간행되던 '만몽일보'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일본 건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시작합니다.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도병 참여를 권고하며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나선것입니다.

최남선이 자행한 친일 활동에 정점은 바로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편수 위원직을 맡은 것입니다.

여기서 최남선은 '단군조선'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참 추악한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바로 '노덕술'입니다.

일제강점기 악질 친일 경찰로 널리알려진 노덕술은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정서며,

중일전쟁시 일본 군수물자 조달을 적극적으로 돕고, 일본전쟁시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조선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지만, 이승만이 반공투사로 치하하면서

국회프락치사건을 조작해 반민특위를 와해하여 풀어주게 됩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합니다. ㅠ

이제부터는 반대로 독립투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인물은 바로 조승우씨가 열연했던 '김원봉' 입니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황푸군관학교에 입학 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 됩니다.

​이후 1946년 조선민청의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월북합니다.

우리에게 의열단원으로 잘 알려진 김원봉은

일제시기 일본군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워낙 신출귀몰하고​ 강직한 성격인 탓에 일본군은 김원봉의 이름만 들어도 떨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남자현'지사입니다.

남자현 지사는 3.1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였으며 여러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62년 여성 최초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고 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그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 불리면서,

다양한 의병활동에 앞장 섰다는 남자현 지사는 독립운동가들을 탈출시기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김상옥' 입니다.

국산품장려운동과 대한광복단에 참여하는 것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여

혁신단, 의열단 등에 참여합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경찰관과 신보사 사원을 부상입히고,

사이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일본군경에 포위당하자 결국 자결하고 맙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에 추서되고, 1988년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습니다.

최근들어, 아베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는 등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듯이,

우리도 우리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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