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프로그램 이미지

교양 매주 일요일 저녁 7시 50분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식객 허영만이 소박한 동네밥상에서 진정한 맛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프로그램

백반일기

백반일기
31회 제대로 보니 맛있구나! 춘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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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관리자 조회수 4786

<제대로 보니 맛있구나! 춘천 밥상>


처음 시작은 강진이었다.

소박하지만 꽉 찬넉넉한 인심이 마음마저 부르게 하는-

그런 밥상을 찾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각 지역의 숨은 보석 찾기를 어언 8개월.

어느덧 한 해의 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주전국을 떠돌다 보니 이제는 집에 있는 시간이 낯설 정도.

마치 젊었을 적으로 돌아가 만화 식객’ 취재하러 다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일이 즐겁게 느껴지는 건

촬영팀의 방문에 불편할 법한데도 반가이 맞아주는 식당 주인들의 환한 미소와

정성스러운 이 한 끼를 더욱 정성스럽게 영상에 담기 위해 두 발 벗고 뛰는 제작진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이 맛을 한 마디라도 더 제대로 표현하는 게 이 늙은이의 몫.

타성에 젖을 때마다 나는 첫 방송을 되돌아보며 처음의 마음가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오늘은 묵은 때를 벗고 내년의 각오를 새로이 정립하고자

그와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다.

낯익으면서도 코끝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름부터가 따뜻한 춘천이다.

이런 곳이라면 필시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

특히 가을 동안 수확한 농작물을 꼬들꼬들 말려 월동을 준비하는 강원도의 맛과 함께라면

올해 마지막 여행은 분명 뜻깊을 터다.


기대감을 가지고 처음 향한 곳은 시장-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임에도 연탄난로 하나에 의탁해 채소를 팔고 있는

춘천 어머니들의 생생한 삶을 느낄 수 있는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시장길 중간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꾸미지 않고 환하게 웃는 미소가 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노사연 씨다.

춘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 자타공인 춘천의 아이유로 불린다는 노사연 씨.

원조 먹방’ 여신인 그녀와 함께 하는 춘천 여행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아니나 다를까첫 집부터 심상치 않다.

시장 중간 자리한 첫 목적지의 주메뉴는 총대를 닮아 총 떡이라 불리는 춘천식 메밀전병.

메밀 반죽을 얇고 넓게 펴 부쳐낸 부침 위에

길게 썬 무와 당면을 매콤하게 무친 것을 올리는데

그냥 봐서는 이게 무슨 맛일까 싶지만

맵싸한 양념에 혀끝이 아리면서도 구수한 뒷맛에 묘하게 반복해서 먹게 된다.

외지인에게는 아리송한 맛이라던데 나는 처음 먹음에도 제법 입맛에 맞아

여러 번 집어먹게 됐다역시 메인 메뉴답다.

그렇다고 함께 나온 감자떡이 결코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뜨끈하게 나왔음에도 풀어지지 않고 쫀득한 식감이 일품.

게다가 소는 어찌나 또 구수하던지-

이 두 가지 음식을 먹자니 비로소 춘천에 온 기분이 든다.



이 여세를 몰아 춘천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한 보리밥 백반집을 찾았다.

이집 아들의 이름 같지만알고 보면 주인장 할머니의 성함을 따서 만들었다는 상호는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의 분위기와 아주 적절히 어울렸다.

대문을 들어서면 길목을 따라 장독이 늘어서 있는데

장독 상태만 봐도 그 집 맛을 알 수 있단 말이 있지 않나-

그처럼 장독이 깨끗이 관리되고 있어서

이 집 주인장참으로 부지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코그런데... 한참 장독 구경을 하다 보니 집 앞에서 길을 잃고 만 게 아닌가?

골목골목 들어가다가 이 집 주인장 부름에 겨우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는데,

잽싸게 부르는 걸 보니 나 같은 손님이 한둘은 아닌가 보다.


겨우 입구를 찾아 들어가 보니 영락없이 가정집이다.

거실 가운데에 테이블 세 개방마다 테이블 두 개해서 사람을 받는데,

손님들 추울까 봐 방바닥마다 전기매트를 깔아 데워 놨다.

그도 모자라 둥그런 철제 난로 위에 뜨끈하게 숭늉을 데워 내어주는데,

주인장의 작지 않은 배려가 느껴졌다.


잠시 기다리자 상 위로 열 대 여섯 가지 찬이 나왔다.

장아찌를 비롯해 나물류가 대다수였는데,

슬쩍 여쭤보니 지난봄가을에 캔 나물을 말려 지금 반찬으로 사용하는 거란다.

밥도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조밥그리고 또 하나는 요즘 보기 힘든 꽁보리밥이다.

보리밥만 먹자니 뒤에 헛헛함이 문제일 것이고

쌀밥만 먹자니 나물과 어우러짐에 뭔가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알아서 섞어 먹으라 두 가지 다 내놓은 것일 터-

작은 체구의 주인장이라고 얕볼 수 없다.

게다가 식감은 어찌나 또 좋은지!

보리 특유의 까끌까끌한 식감은 사라지고 탱글탱글함만 남았다.

일부러 보리밥을 두 번 조리했다는 게 허튼 말이 아닌가 보다.


하지만 이 집에 제일 핵심은 따로 있었으니-

구수한 맛이 일품인 막장!

보통 밥을 비벼 먹는 장은 고추장 혹은 젓갈이 나오기 마련.

그런데 여기선 막장 하나만 나온다.

막장에 비벼 먹어야 제대로 강원도식이란 것.

된장 같지 않을까쿰쿰한 맛은 아닐까-

걱정 반기대 반으로 한 숟갈 푹 퍼서 비벼 먹어보니

생각보다 괜찮다!

묘하게 단맛도 나고 나물과 어우러져 구수하기도 하다.

건 나물의 맛을 막장이 더 살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이 보리밥이 강원도의 정석인지 알 것만 같다.


그 흔한 생선구이나 고기 한 점 없지만충분히 배부르고 든든하게 잘 먹었다~

그나저나 주인 양반이 건강하셔야 할 텐데..

야윈 모습을 보니 걱정만 한없이 앞선다.


다음은 내 단골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친구들과 춘천을 찾을 때면 꼭 한 번씩은 들르는 집.

호반의 도시’ 춘천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집.

바로 모래무지 조림집이다.

요새 젊은 친구들은 닭볶음탕을 먹으러 이 집을 찾는다는데,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집이 모래무지 조림으로 이름깨나 날렸다.


이름부터가 모래무지 조림이다 보니 모래무지 맛이 가장 중요한데

잔뼈가 많아서 먹기 성가시지만그 살맛은 탄탄하니 어느 민물고기보다 식감이 좋다.

누군가는 은어처럼 수박 향이 난다고도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수박 향까진 아닌 것 같다그냥 고소한 맛?

보통의 민물 생선과 달리 모래 냄새가 나지 않아 아마 그런 말이 돈 건 아닐까?

아무튼 예부터 춘천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잡히는 어종이다 보니 그 음식의 내공은 다른 지역보다도 뛰어난 것 같다.


게다가 직접 말린 시래기의 맛이란!

부드럽기도 부드럽거니와 그 특유의 구수하고 단맛은 어느 동네 시래기보다도 훌륭했다.

아니월등하단 말이 더 어울린다.

특히 이 시래기가 국물을 잔뜩 머금은 채 있을 때의 맛은

밥 한 공기로도 모자랄 정도다.

다만한 가지가 아쉬운 점은 이 시래기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모래무지를 제치고 주연 자리를 뺏었달까.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단골집의 맛이 그대로라서 좋다.


이번엔 막국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노사연 씨를 위해서 특별한 곳을 찾았다.

이북 출신의 부모님 밑에서 자라 슴슴한 맛을 즐길 줄 안다는 사연 씨와 함께 찾은 이곳은

요즘 식 새콤달콤한 막국수가 아닌 옛날 방식의 슴슴하고 고소한 막국수를 내는 집이다.

무려 44년이나 막국수를 만들어온 가문이라니 그 맛은 충분히 보장됐을 터-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사연 씨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벽면 가득 이 맛은 내가 보장하노라며 어느 이름 모를 평범한 이들의 사인이 이 집 막국수에 대한 신뢰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뿐만이랴막국숫집이라면 으레 나오는 면수도 구수함이 남다르다.

간을 맞추려고 간장을 슬쩍 탔는데도 메밀 향이 우러나올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이리 기대를 주다니~

왜 막국수 마니아들 사이에서 숨은 성지로 불리는지 알겠다.


드디어 소문의 막국수가 나타났다.

메밀 100%라고 들어서 까맣게 나올 줄 알았더니 색깔이 희끄무레하다.

제분하고 온 거라서 그렇다나.

괜히 마음이 바빠져 얼른 양념장에 비빈 후 한 입 떠먹어보니

오호맛이나 식감이 상당히 괜찮다.

빨간 양념장의 맛이 과하지도 않으면서 메밀 향이 살아있다.

처음에는 과한 메밀 맛에 떫다고도 느꼈는데 씹다 보니 밑에서부터 고소함이 올라온달까?

동치미 육수가 아니라 사골 육수라며 내놓은 국물도

막국수에 섞어 먹어보니 제법 메밀 향과 어우러져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어떻게 이 조화를 만들어낸 건지절로 무릎이 ’ 쳐진다.

게다가 수육처럼 삶아낸 편육의 맛은 어찌나 기가 막힌 지!

수육만 따로 한 접시 주문했을 정도.


슬쩍 이 집 주인에게 어떻게 이런 냉면 같은 막국수를 만들어냈냐며 물어보니,

비결은 다름 아닌 에 있단다.

재료도 아니고 조리법도 아니고 힘이라니~

얼핏 들어선 이해되지 않을 말이지만,

주인장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한 방에 탁 이해가 됐다.

50년이 넘은 제면기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동 기기가 아니라 오로지 힘으로 눌러야만 면이 나오는 시스템.

그래서 주인장이 없을 때면 아내가 단골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겨우 장사를 이어간단다.

이 늙은이는 엄두도 못 낼 지경.

대신 사연 씨가 막대를 쥐었는데어휴역시 장군님은 장군님이다!


이번엔 나도 처음 들어본 음식을 먹으러 중국집으로 향했다.

춘천까지 가서 무슨 중국집이냐 하겠지만

이 집 단골들에겐 섭섭한 말씀.

춘천 중국집은 소위 클래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직접 만든 중국식 춘장으로 짜장을 볶아내는가 하면,

농사를 지어 재료로 써 믿고 먹을 수 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나온 게 백년짜장.

무려 100년 전 맛을 재현한 거라고 하니 괜스레 먹기 전부터 기대가 된다.


그런데 100년 전 짜장이라서 그런가색깔이 우리가 익히 알던 짜장이 아니다.

색깔도 투명한 갈색에 가깝고 맛도 조금 더 된장 맛에 가깝다.


이름부터가 생소한 중국식 국밥은 또 어떤가.

겉으로 보기엔 짬뽕과 비슷하지만불맛을 죽이고 오로지 진하고 담백한 맛으로 승부를 본 이 음식은 중국 음식엔 꽤 민감한 내 입조차 사로잡았다.

화교인 주인장의 할머님이 아버님에게 해주던 음식은

어느덧 춘천인들 사이에서는 소울 푸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해물 하나 없이 한국식 국밥처럼 고기로 맛을 냈는데

등심이라서 그런지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물론숙성 과정에서 주인장의 센스도 한몫했겠지.


춘천의 맛을 알려거든 이 집 절대 빼놓을 수 없겠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춘천의 대표 음식은

100이면 100, 다 인정할 닭갈비”!

철판이 먼저냐숯불이 먼저냐 의견도 분분했지만

춘천시 공식 닭갈비의 원조는 숯불닭갈비가 철판 닭갈비보다 9년 먼저 생겼단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채소를 넣다 보니 철판 닭갈비로 발전했단 것.


그래서 춘천 닭갈비의 원조집으로 불리는 곳을 찾았다.

자타공인 춘천의 아이유노사연 씨도 생소하다는 이 집은

사실 여러 매스컴을 통해 원조로 증명된 곳이다.

그래서 익히 들어오던 차에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이번 기회를 빌미 삼아 찾게 된 것이다.


처음 들어가니 메뉴판에 꽤 많은 종류가 보였다.

닭갈비면 닭갈비지 뭐 이리 많나 했더니

옛날 영업하던 때어떤 부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판매하던 게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향수 그대로 느끼고자 주인장의 추천을 받아 원조 닭갈비를 먼저 맛봤다.

뭐 양념은 달큰하면서 매콤하니 딱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맛이다.

살의 탄력도 보드라우면서 쫄깃하니 맛이 꽤 마음에 든다.

이 맛을 내기 위해 양념장에 파인애플을 넣었다는 주인장.

역시 음식을 하는 사람은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가 상당하다.

절대 그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집의 압권은 오도독뼈 닭갈비.

고기는 매우 부드러운 데 반해

그 속에서 한 번씩 오독오독 씹히는 오도독뼈의 식감이 굉장히 좋았다.

그렇다고 단단한 것도 아니고 이가 안 좋은 사람도 쉽게 씹을 수 있을 정도.

왜 이 집이 원조인지 알만했다.


이번엔 옆 테이블 총각의 추천을 받아 닭 내장에 도전했다.

일흔둘 인생에서 나도 처음 경험하는 것.

특히 알은 흰자 없이 노른자만 부드럽게 구워져 마치 아주 결이 좋은 군밤을 먹는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식감이나 맛이 괜찮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괜찮았던 건 닭 모래집.

닭을 잡은 지 얼마 안 됐던지 모래집의 상태가 굉장히 신선했다.


이번 식사를 통해 쉽사리 경험하기 힘든 닭 한 마리를 모두 먹어봤다.

색다른 만큼 뇌리에서 쉽게 지우기 힘든 경험일 것이다.

이런 경험은 춘천이 아니었다면 하기 힘들었겠지-


올해 마지막 여행이 뜻깊다.



벌써 한 해가 끝나간다.

내 개인적으로도 뜻깊었던 2019.

익숙하지만 늘 설렘을 주는 춘천에서 이 해를 마무리하고 나니,

뭔지 모르게 2020년에 대한 용기가 생겨난다.

내년에는 또 어떤 음식들이 나를 반겨줄지...

아쉬움보다는 산뜻한 기대감이 생기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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