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소감
가족 두개의문을 시청 하면서 더욱더 가족의 소중함을 느껴 봅니다.
7살때 어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리시다가 집을 나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잘못들을 수습하시느냐고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늘 술만 드시면 지내오셨죠.
아버지께서 술만 드시고 온날에는 매일같이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갖은 욕설과 폭행을 마구 하셨지요.
어느날 아버지께서 재털이를 던지셨는데 제 이마에 맞아 정신도 잃은적도 있었답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는 잘못이었지만, 이게 다 집을 나가신 어머니때문에
괴로운 마음에 저에게 화풀이를 하신다고만 여겼지요.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신 뒤로는 매일같이 술만 드시고 밖안 외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 긴장을 놓치수가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아침이 되도록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셨지요.
술드시고 어디 다른곳에서 주무시나 했습니다.
히지만 하루가 지나고,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유일하게 연락할수 있는 곳은 시골에 계신 친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혼자 지내면서 외로움과 공포는 장난이 아니었지요.
밤이되면 어린 마음에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습니다.
몇일이 지나고, 집으로 낯선 사람들이 찻아왔습니다.
경찰관 아저씨라면서 신분증을 보여주며 저를 안심시켰지요.
찻아온 이유는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뺑소니로 사망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니야,아니야, 소리지르며 하염없이 울었지요.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계시는 영안실로 찻아가 통나무처럼 굳은 아버지의 얼굴을
만져보았습니다.
늘 술만 드시고 심한 욕설에 폭행까지 하신 아버지셨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후, 저는 어쩔수 없이 시골 할머니집에서 지내게 되었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힘이 들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에게 부모님 없는 아이라며 놀림을 받아야만 했고,
도시락반찬을 된장깻잎을 싸온다며 심지어는 단체로 아이들에게 맞아 이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맞는것보다 더 치욕스러웠어요.
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친구도 사귈수가 없었습니다.
따돌림을 받을때마다 저를 위해서 고생 하시는 할머니를 생각해서 참았지요.
3년 이라는 따돌림 속에서 간신히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후 저는 고등학교 원서를 내지 않고 할머니 몰래 학교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하고
방황된 생활을 했습니다.
동네 이웃 어르신의 자전거를 훔쳐 고물상에도 팔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빈집에 들어가
돈이될만한것들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끝내는 할머니께서 콩밭을 일궈 애지중지 모아오신 돈까지 가지고 집을 나왔지요.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방황하며 사람임을 포기하듯 지내왔습니다.
기차를 타고 우연히 서울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답니다.
취직을 한 이유는 당장 먹고지낼곳이 없어서 어쩌면 순간을 피할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짜장면 배달을 하면서 간간이 먹고지내기에는 괜찮았지요.
또, 사고가 터졌습니다.
배달중에 그날 하루 수금한 짜장면값과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
잡히게 되었습니다.
도망생활을 하다가 돈도 떨어지고 해서 또 늪에 하염없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핸드백을 뺏어 달아나고, 술취한 취객들을 대상으로 지갑과 손목시계를 훔쳐
달아났지요.
시골할머니집에서 나와 생활한지도 2년정도 흐를 무렵, 불신검문으로 잡히게 되었고
그동안 나쁜짓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행동이 그렇게 나쁜짓이는지 모르고 했는데,큰죄에 해당이 된다는 것을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으면서 느끼게 되었지요.
2년6개월 실형을 언도받고 저는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깊히 반성하고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께 편지를 꼬박꼬박 썼지요.
출소하면 할머니께 못다한 효도를 다할수 있게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말입니다.
수감생활 10개월만에 또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어요.
이유는 피해자가 또 나타나서 거기에 해당되는 죄값을 더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더 언도 받고 총 3년2개월동안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출소를 하게되었답니다.
출소후 저는 작은 기계선반공장에 취직을 하게되었습니다.
꼭 기술을 배워 성공을 하겠다는 각오로 특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지요.
그리고 얼마되지 않는 월급이었지만,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께 생활비와 약값에 보태쓰시라고
매달 보내드렸습니다.
할머니의 고질병인 관절염과 신경통을 고쳐드리기 위한 목표를 삼고 열심히 기술을 연마했지요.
하지만,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기계 앞에서 하루종일 서있고, 기계와 사투를 버리면 저녁이 되어 온힘이 다 빠진곤 하지요.
열악한 환경 이지만 그래도 제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반드시 기술인으로
평과를 받고 싶어서 열심히 땀흘려 노력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법 혼자서도 연삭기 기계를 다룰줄 알고, 기계정비도 조금씩 눈에 들어올 시기였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상과 다를봐 없이 공장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작업을 할때 일이 터지고 맙니다.
원통연삭기 기계작업중 손가락 두마디가 밀려 들어가서 절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늘 공장에서는 안전사고에 철절히 하라는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그날은 제가 좀더 집중을 못했는지,
아니면 몸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참으로 운이 없었습니다.
사장님의 배려로 병가휴가를 주셔서 자취방에서 회복을 할수가 있었어요.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많이 걱정 하실까봐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쉴수는 없고, 돈은 벌어야 되서 보름정도 쉬고 다시 공장에 출근을 해서
난이도가 적은 작업일을 했지요.
퇴근후 자취방에서 외롭게 누워 있으면 자꾸 허무한 생각들뿐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없고,손가락 마저도 잃고, 키도 작고, 못생기고, 말도 잘못하고... 그런 제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쓸쓸히 지냈어요.
그래도 다행인것은 손가락 열마디중에 두마디만 없을뿐이지, 왼손으로 밥도 먹을수 있고,
기계작업에는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 틈틈히 자격증 공부를 했지요.
2년동안 틈틈히 공부하면서 드디어 기계정비기능사를 취득할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기계설계에 꿈을 두고 차츰차츰 기계기술인으로 성장해 나갔지요.
비록 고등학교도 못나왔지만, 주변에서는 기술이 최고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작은공장에서 6년동안 갈고 딱고 기계연마,연삭등의 기술을 습득하고
좀더 배우기 위해서 산업보일러를 제조하는 업체에 취직을 하게되었습니다.
제 나이 28세, 이제는 할머니께 예쁜 손주도 안겨드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결혼에 대한 생각을 깊히 하게되었답니다.
하지만, 손가락 두마디도 없고, 배운것도 없어서 모두들 저를 꺼려 했습니다.
공장 지인의 도움으로 국제결혼을 중국인과 하게되었지요.
하지만, 신혼도 잠시 중국인 아내는 저랑 살기가 싫다며 집을 나가버렸답니다.
아무리 돈으로 국제결혼을 성사시켜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정말 배신감이 너무도 컸지요.
다행히 아이는 낳지 않아서 공장일에 매진할수가 있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환상,그리고 기쁨과 행복도 잠시, 다시 제 꿈을 위해서 기계일에
매달렸습니다.
열심히 매달려 있지 않으면 괴로운 마음 때문에 아무일도 할수가 없었어요.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제자신과 오로지 기계에 대한 열정만 보고 말이지요.
산업용보일러 생산 수급이 늘어가고 있을때쯤, 생산관리1팀 과장으로 진급을 하게 되었답니다.
고등학교도 못나오고, 자격증도 기능사가 전부인데말이죠.
더욱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생각하고 저는 기계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을 굳게 붙이고
기계설계산업기사를 취득할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17살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벌써 기계밥을 먹은지가 20년이 되어 가네요.
부모님도 잃고, 아이들에게 따돌림으로 사람의 정도 잃고, 두마디 손가락도 잃었지만,
저는 언제나 혼자가 아닌, 가슴속에 늘 부모님 가족이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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