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미스트롯2 프로그램 이미지

예능 매주 목요일 밤 10시

내일은 미스트롯2

다시 여자다! 오디션이 낳은 최고의 스타 임영웅!
그의 신화를 이을 글로벌 트롯 여제는 누구일까?
트롯 춘추전국시대에 오롯이 빛나는 단 하나의 오리지널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소감

시청소감
포악한 그들을 굴복시키고 길들인 코리아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2021.02.12윤복현 조회수 279



약탈한 선비족을 굴복시켜 용병으로 사용한 고구려


귀속당한 선비족은 고구려의 기마전술을 통하여

훗날 중국을 차지하게 되는 기반을 닦는다!고구려

태조왕 당시 선비족 8천명을 용병으로 삼고 한나라의

한군현지역을 회복하였다. 한군현지역은 고조선 고토다!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121(태조대왕 69)에는 한나라와의 큰 전쟁이 있었다. 봄에 유주 자사를 비롯해 현도 태수, 요동 태수 등이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자, 태조대왕은 동생인 수성(遂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 맞서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거짓 항복을 하는 등 기만술을 사용하여 적들을 방심시켰다가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한나라군의 구원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구려군이 철수한 뒤였다. 같은 해 여름에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 8,000여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약탈하였고, 추격해 오는 요동 태수와 그 이하 관속들을 살해하였다. "



기원전 9년 고구려 2대 유리왕 11년, 선비족들은 또다시 고구려를 침입해 왔다. 사실 선비족의 침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북방유목민족이었지만 거주지가 험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때 산악지대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쪽 요동지방의 한군현이나 남쪽의 낙랑국과 고구려는 적대관계였고, 북방의 부여와도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 선비족들은 매우 강성하였을 뿐 아니라, 서북방면의 흥안령산맥을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정벌할 수 없었다.

유리명왕은 선비가 그들의 거주지의 험함을 믿고 고구려와 화친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이로우면 나가 노략질을 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어 고구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으니, 누구든지 능히 이를 꺾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선비족에 대해 살펴 보자.

 기원전 197년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나라가 중국의 한제국이다. 그런데 그 한제국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위촉오가 중국을 삼분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위촉오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유비, 조조, 손권등이 자웅을 다투던 시대인데, 그 시대가 가고 사마씨에 위해 세워진 진국에 의해 잠깐동안 중국은 통일을 이룬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진국을 파멸시키고 중국대륙을 대 분열시켰던 민족이 바로 선비족이다. 이후 선비족은 더욱 강성해져 황하강 이북의 화북지방을 모두점령하던 북위정권(386∼534)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런대 이 때 유리왕에게 선비족을 정벌하고 나섰던 장군이 바로 부위염이다. 부위염은 정확히 어디출신이며,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때부터 활약을 하였던 장군이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고려조 대문인인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그가 비려국 원정에 앞서 고각을 훔쳐온 일은 매우 자세히 나와있다.
 
  왕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새로우니 아직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다.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할 때에, 내가 왕의 예로써 영송(迎送)을 할 도리가 없으니, 우리를 업신여기는 구실이 되겠다."고 하였다. 시종하던 신하인 부분노(扶芬奴)가 나아와서 이르기를 "신이 대왕님을 위하여 비류국의 고각을 취하여 오겠읍니다."고 하매, 


 왕이 "타국의 장물(藏物)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고 말하였다.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어찌하여 가지지 못하겠습니까? 대체로 대왕님이 부여에서 곤궁하실 적에 어느 누가 이곳에 오시리라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님이 만 번 죽을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 나와 요좌(遼左)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시어 이루신 일이오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읍니까?"
하고는, 부분노(扶芬奴) 등 3인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훔쳐 가지고 왔다.
비류국 왕이 사자를 보내어 아뢰기를 무어라 무어라하였다. 왕은 고각을 와서 볼까 염려하여 어둡게 색칠해 오래된 것 같이 해 놓았더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東國李相國集 3, 古律詩, [東明王篇]

 부분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고각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당연히 천손인 동명성왕이 갖는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절도행위로 볼 수 있겠지만, 고각은 각종 제사및 행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군대를 통솔할 때 쓰이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고구려는 부분노가 목숨을 걸고 가져 온 고각으로 인해 비류국과의 졸본지역 주도권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고 갈 수 있었으며, 각종 의식을 갖추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케 큰 공을 세운 부분노였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이유는 동국이상국집에도 언급되었듯 그의 신분이 임금을 수행하는 하위급 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장군과 함께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는데 공을 세운다. 이때 원정군의 총장은 마땅이 오이였을 것이고, 부분노는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선봉장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기원전 9년(유리명왕 11년)에 시행된 선비족 정벌은 그로써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단순히 무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리왕에게 "선비는 험고한 나라요, 그들은 용맹하지만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계책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부분노가 말한 계책은 허허실실의 전략이다. 우선 선비족에게,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라는 거짓정보를 흘려 선비족으로 하여금 방심하고 수비를 게을리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전략은 성동격서였다. 성동격서는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빈이 자주쓰던 책략으로  동쪽을 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는 뜻이다.
 이것은 2차 대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도 썼던 매우 유용한 전략으로서, 적의 전력을 분산 이동시켜 아군의 공격목표지점을 드러내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분노는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직접 매복작전을 실시해, 선비족이 유인책에 걸려든 틈을 타 그 성을 점령할 것임을 알리고, 유리왕으로 하여금 직접 출전하여 군사를 지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은 이 의견에 따라 군대를 배치하니 과연 선비족은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분노는 길이 좁아지는 관문에서 그들을 막아섰고,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그가 정벌한 땅을 식읍으로 주려 하였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첨부파일

댓글 0

(0/100)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