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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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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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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윤복현 조회수 504



백성들의 친구이면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구하는 자가 영웅이다!




한민족사 영웅/당의 침략을 물리치고 당태종을 쫒아 장안성에서 항복받은 연개소문




조의선인 연개소문

연개소문 은 중국 경극(獨木關) 등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그 줄거리는 당태종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 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연개소문 과 설인귀가 주인공이고 당태종이 조연이다. 경극에 나온 연개소문 은 용맹한 장군이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화장하는데, 푸른빛의 얼굴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적이었던 당나라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 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김부식이 ‘묘청의 난’4)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쓴 역사서로서, 중국을 사모한 김부식이 사대주의 눈으로 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한민족 정통사서인『환단고기/태백일사』는 전혀 다른 면에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여기서 ‘조의선인’이란 말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핵심이 깃들어 있다.

조의선인은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이들은 천신신앙을 바탕으로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목숨을 던져 살신성도(殺身成道)하는 것을 삶의 이상과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당태종은 원정실패에 깊이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이후 상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연개소문 은 당군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요동성을 회복하고 당 장안 인근 용도성(桶道城)2)에 일군을 보내 당태종을 계속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당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그리고 649년 당태종이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파요동지역(罷遼東之役),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연개소문)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을 하였는데,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의 전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도 “고혜진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고 하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로 모두 숨겨놓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개소문 이 657년에 사망3)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풍전등화의 민족을 깨웠던 연개소문의 절규

민족사서인 『태백일사』는 연개소문 의 면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이에 연개소문 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 “ 연개소문 이 또 동북·서남에 장성(長城) 쌓기를 주청하였다 하여 장성을 쌓는 것이 연개소문 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단재선생은 ‘ 연개소문 이 노자상과 도사(道士)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說)이니라’고 단호히 비판하고 있다. 연개소문 은 철저한 반당(反唐)주의자였다. 그러한 그가 명백히 적국인 당의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 은 나라를 위해서는 홀로 허망하게 죽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연개소문 의 이 말은 민족의 주체성을 스스로 내주고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에 대한 절규였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 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하나 『태백일사』에서는 황제가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연개소문 은 군사와 정치를 함께 통솔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제 상좌평(上佐平) 성충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으며, 또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자신의 사저에 머무르게 하고 삼국연합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고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보장제 3년(644년), 불과 3년 만에 당은 연개소문 의 쿠데타를 이유로 침략해 들어왔다. 당은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훈련된 정병(正兵)을 차출했으며, 수나라가 대군으로 바로 평양으로 진격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을지문덕에 패배한 것을 반성하여 요동성부터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동시에 수군은 군사와 군량미를 실어 나르게 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전략을 눈치 채고 여러 성을 지는 듯 내주었다. 그러나 당군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는 3개월에 걸친 치열한 대접전 끝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다. 당군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에 연개소문 이 말갈병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단행하자 당군은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퇴각한다. 퇴각하려는 와중에 하늘에 띄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당태종의 왼쪽 눈이 빠져버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때 당나라 군대가 얼마나 퇴각을 서둘렀는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수렁으로 변한 요수 하류에 길을 만들어 건너야할 정도였다. 당시 당태종 스스로도 말채찍 끈으로 나뭇단 묶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이처럼 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나라가 을지문덕의 전략에 참패했던 것처럼 전쟁을 총지휘하던 연개소문 의 전략에 빠져 배후를 공격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하는 등 큰 위기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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