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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즉위직후부터 5년후엔 명성황후를 통해 군주의 위엄과 미국의 교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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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채재찬 조회수 927

1905년 7.29 을사조약 이전에 있었던 일을 쓴다

이제 우리가 미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즉 주요내용은  비밀로하고  주변만  회담 자체만  이야기했기때문입니다

 

보통 가쓰라-태프트 밀약

'SPA 한국의 역사'라는

책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에 맺어졌습니다.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둘째, 극동의 평화를 위해 미국 영국 일본 삼국은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것을 승인한다.

 

이렇게 세개의 전문이 나와있네요. 이 내용은 [미국 역사 자료집]이라는 서적에서

발췌되어진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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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Roosevelt)의 딸인 엘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인 1905년 9월 19일, 당시 미국에서 영향력 있던 수십명의 정치계 인사들과 아시아 순방길에 올라 일본을 거쳐 필리핀,중국을 방문했던 미국 대통령의 딸 엘리스 루즈벨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당시 엘리스는 미국에서 엘리스 공주(Princess Alice)라고 불릴 정도로 사교계의 꽃이었고, 심지어 정치계에서도 영향력이 있을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든 옷감의 종류가 있을정도로, 그녀는 미국에서 연예인같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시아 순방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이 직접 그녀를 알현하였고, 화려한 만찬과 무도회를 열었었다.

필리핀에서도 역시 그녀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심지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당시 최고의 여걸이었던 서태후가 그녀를 직접 만났고, 그녀에게 진귀한 보석과 비단, 심지어 애완견까지 선물하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였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일본으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 역시 그녀를 직접 알현하기로 하였고, 대한제국의 실태를 그녀와 논의 하기로 마음을 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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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제국행 군함 오하이호 호를 타고 있었던 엘리스 루즈벨트...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드디어 1905년 9월 19일, 엘리스 일행을 태운 군함 오하이오 호가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그들을 위해 고종황제는 여러나라의 국기가 게양 된 특급 열차를 준비하였고,수많은 대한제국의 관리들과 근위병들이 백성들과 함께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또,그들이 서울을 도착했을때 황실에서는 황실 가마를 배정하였고, 모든 일행들에게도 역시 관청의 가마를 준비하였다. 거기에다, 고종황제는 서울의 모든 주택에 미국의 국기를 게양하였고, 이로써 그들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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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엘리스 루스벨트의 대한제국 방문에 대한 기사를 쓴 프랑스의 신문에 붙여진 그림.

 

마침내 20일, 엘리스는 방문단 일행과 함께 황실을 예방하고 대한제국의 관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21일, 고종황제는 그들을 위해 가든파티를 열어주었고 그 자리에서 대한제국에 거주하던 미국인들과도 만났다.

22일, 엘리스 일행은 고종황제와 점심을 함께 하고 오후에는 동대문 밖에 있는 황제비(명성황후)의 무덤을 방문하였다.

(당시 고종황제가 엘리스일행과 함께 명성황후의 무덤을 방문한 목적은 아무래도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온 명성황후의 무덤은 당시 영휘원(홍릉을 관장하는 구역)으로 불리었지만, 고종황제 승하 이후, 1919년 남양주군 금곡으로 옮겨진 뒤 계속 홍릉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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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알현 장소였던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 1919년에 이전되었다.

 

여기까지 보면은 형식상으로는 제대로 된 알현이라고 생각을 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를 보면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이 도사리고 있다...

독일 여성인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의전담당으로 당시 엘리스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방문할 당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1909년에 나온 자신의 자서전"내가 어떻게 조선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는가(Wie ich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에서 당시 형식상과는 매우 다를 엘리스의 한국 방문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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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크뢰벨이 쓴 저서에 따르면

 

"우리가 (영휘원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먼지의 폭풍이 우리에게 몰아닥쳤고 그 먼지 속으로부터 한 무리의 말을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그 무리의 선두에는 위세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색의 긴 승마복을 입었고 그 아래에는 몸에 꼭 맞는 승마용 바지를 반짝거리는 승마용 장화 속에 접어 넣은 것이 얼핏얼핏 보였으며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그여성이 바로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였다.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그 모습을 본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리에 있던 우리 일행이 한국 왕실의 격식에 따라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으나 이 "의용기병대의 딸"은 이 모든것이 장난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써 내가 환영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몇마디의 고맙다는 말, 그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무덤가에서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동물들의 조각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 했다"

 

... 여기까지도 엄청난 충격에다가 무례함이 있는데, 그 뒤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큰 코끼리 석상이었는데 그녀는 곁눈으로 흘낏 보더니 재빨리 말에서 내려서 순식간에 그 코끼리 석상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롱워스(Nicholas Lopngworth)<엘리스의 약혼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쳤다. 이것을 본 우리 일행은 그녀의 그런 망나니 같은 짓에 경악했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저지른 그와 같은 무례한 짓은 한국의 (외교)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말 중차대한 순간이었는데도 차와 다른 음식이 나오면서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엘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 이후로는 어떠한 감사의 인사도 없었고 그녀는 모건 공사부인과 잡담을 나누면서 씩씩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또 다른 음식들을 즐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엘리스는 모두에게 말에 오르라고 명령하고는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과 함께 버팔로 빌처럼 말을 타고 떠나갔다."

 

이 내용을 보면 엘리스는 외교를 하러 온 사람으로써는 엄청난 망나니같은 짓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심지어 고종이 보는 앞에서 황후인 명성황후의 묘에서 그런 엄청난 짓을 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고종의 목표인 대한제국 실태논의와는 달리 엘리스는 논의와는 아주 동떨어진 말만하고 사라졌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로써는 수치스러웠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건은 엠마 크뢰벨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1909년 11월20일 발행된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한동안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된 공화당 의원 롱워스는 이 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이고 엠마 크뢰벨이 당시 다른 사람을 엘리스로 착각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한편, 기사가 실리자 엘리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비웃었다고 합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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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내용은 롱워스부인이 된 엘리스가 한국에서 저지른 무례함을 보도한 내용이고,오른쪽은 이 기사가 난 바로 다음 날 그녀의 남편인 롱워스가 기사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이었을까요???

여기에 답을 줄 단서가 코넬대학교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1905년 경 당시 사건이 일어날 당시 미국 공사관에서 공사 서기로 근무했던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D.straight)라는 사람이 남긴 편지와 수백 장의 사진이 코넬 대학교 도서관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료는 나중에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친절하게'루즈벨트양의 한국에서의 사건(Alice Roosevelt at Seoul)'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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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엠마 크뢰벨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엠마 역시 두려웠던 것일까요??? 자서전에서 빠트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일행들 대부분이 석상에 앉거나 기대어 찍은 사진이 있다는 것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여기네는 롱워스도 있죠...)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엘리스는 아시아 순방길에서는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를 모두 논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이런 짓을 하였을까요???

여기에도 역시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수십년 뒤 엘리스는 1934년에 자서전 'Crowded Hours'에서 한국에 대해 이렀게 썼습니다...

 

"한국은 원하지 않았으나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손아귀 아래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퍼보였고 낙담한 것 같았다. 그들의 몸에서 힘이라는 힘이 모두 빠져 나간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장소에 일본 장교들과 병사들, 그리고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고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 내용 이외에도 당시 사건을 언급한 글도 섰다...

 

"황제와 곤 이어 마지막 황제가 될 그의 아들(순종)은 우리 공사관 곁에 있던 궁전에서 내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 그 궁전의 유럽식 건물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였다. 우리는 먼저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고 땅딸막한 황제는 나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지 않은 대신(손을 내밀에 엘리스가 잡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서둘러서 좁은 계단을 내려가 특히 주목할 것 없고 조그마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음식은 한국식이었는데 황실문장으로 장식된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내가 사용한 그릇들은 식사 후 나에게 선물로 증정되었다. 궁전을 떠날 때 황제와 그의 아들은 각자 나에게 자신들의 사진을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애처롭고 둔감한 인물들이었으며 황실로써 그들의 존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내용에서는 당시 무너지고 있던 대한제국을 구하기 위한 고종의 노력이 보이고 있고, 당시의 상황을 잘 나타냅니다. 또, 엘리스가 바라본 한국에 대한 시선이 보이는데요, 엘리스는 분명 순종이 마지막 황제가 될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바로 1905년 당시 엘리스가 아시아 순방을 하고 있었을 때 일본에서 맺어진 조약과 연관이 있습니다.

순방을 갔을 때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신임하는 육군성 장관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바로 루스벨트 다음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태프트(William H.Taft)였습니다.

 

1905년 7월, 당시 아시에 순방단의 첫번째 기착지였던 일본에 도착한 태프트는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를 만나 비밀 협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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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순방길 당시 일본에서 윌리엄 테프트가 엘리스 루즈벨트와 나란히 행사장으로 입장하는 모습. 1905년 아시아 순방 기록사진.

 

훗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알려진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는데, 당시의 주요내용은 바로 "미국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것"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엘리스의 한국 방문사건이후 체결된 조약에서 발휘되는데요, 이 조약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을사 늑약(흔히 을사 조약이라고 말하지만, 황제가 인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늑약이라 보는 것이 적당합니다...)입니다.

이렇듯 대한제국에 대한 권리를 넘겨준줄 모른 채 고종은 순방단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을 했던건가요? 엘리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대한제국을 구하려고 한 사람들의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우방인 나라인걸까요? 이것이 바로 강대국들 사이에서 희생된 우리나라의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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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 태프트 밀약 (1905)

 

1.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의도도 갖지 않는다.

2. 극동의 전반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일본, 미국, 영국 등 3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 · 일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인정한다.

 

이 조약은 가쓰라 ·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하는 암묵적인 밀약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에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회담을 가졌다. 1905년 7월 27일 비밀회담에서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최종 밀약은 7월 29일에 만들어졌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가쓰라 다로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의 중점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쓰라 다로: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 필리핀은 일본과 같이 강력하고 우호적인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에 최선일 것이다.

가쓰라 다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공격계획도 가지지 않고 있다.

 

가쓰라 다로: 러 · 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나라는 대한제국이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 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 · 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 · 일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인정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 ·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서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어 1905년 8월 12일에 맺어진 제2차 영 · 일 동맹과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채결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세계 만국으로 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1905년)

제1조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이하 6조 생략)

 

한편 조선정부는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줄도 모르고 러시아와 미국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비밀조약은 192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의 T.데넷 교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서한집에서 발견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광복 이후 조·미 수호통상조약 (1882년)에 있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 라는 조항을 위배했다며 미국의 행동에 규탄하기도 하였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은 1905년7월27일 장시간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가?  일명 가쓰라 태프트 밀약

 

 

 

 

   2007년 9월30일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재연된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한미 과거사 논란으로 번졌다.

최성 의원(열린우리당)이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미국민에게 여러 가지 오해와 서운함을 안겨준 데 대해 여당 의원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며 질의를 시작하자 같은 당 김원웅 의원은 미국측의 반응을 이해한다면서도 “100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비롯된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미국측의 역사적 책임의식이 결여돼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박계동 의원(한나라당)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이 조작한 역사를 갖고 미국이 (한반도의) 식민지화 과정에 악역을 했다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고 반박함으로써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 여부와 일본의 한반도 병탄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놓고 역사 논란이 제기됐다.

 (신동아에서 발췌한 카쓰라 태프트 밀약 에 대한 전후 사정을 재 조명한 기사 - 정치인은 말은 생각해서 해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 )

 

 

 역사적인 사실 이전에 하나의 외교적인 정치 행위에 대한 것을  2005년 11월 신동아에 기고되었던 김기정 교수의 글을 통해서 되집어 보는 것도 좋은 공부라 생각해서 올립니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해줌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과연 존재했던 조약인가. 아니면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가공(架空)의 산물인가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습니다. 1924년에야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 회담의 산물입니다. 도대체 밀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밀약과 관련해 어떤 점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일가요?

 

 우선, 1905년 7월의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부터 살펴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벌인 일전이었습니다. 일본은 1905년 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러시아 점령하의 뤼순(旅順)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의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해 5월 동해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까지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었으며,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결했습니다. 우선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관련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배경에서 탄생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서  일본이 어떠한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라인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 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데넷의 논문에는 회담 직후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이 실려 있는데, 전문에 나타난 회담 내용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사안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문제와 관련해 가쓰라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 임을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논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며, 태프트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 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 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서도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습니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을까 하는 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으며,  이미 1899년·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기때문에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것 입니다.

 

 

 

.합의각서인가 아님 협약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입니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 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습니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으며,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습니다.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습니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며,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입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습니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니,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습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데,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입니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으며,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습니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입니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었을 것이며,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습니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었으며,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 는 점에서도 드러나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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