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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매주 토요일 밤 10시 30분

강적들

대한민국 최강! 센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품격과 저품격 사이의 아슬아슬한 시사 쇼!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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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땜은 정치공작이 아니고 제5공화국의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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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이의상 조회수 431

 


1. 금강산땜 (임남땜)은 정치공작에 의한 허위정보가 아니고 명백한 북한의 도발입니다.

가. 당시 한국군은 금강산땜을 탐지, 추적 및 분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 이는 당시 주한미군정보참모부장 (James Clapper 공군준장, 현재는 국방정보부장 (DIA) 등을 역임하고 국가안보국장 (DNI)으로 재직)의 지시에 따라 아웅산테러 및 KAL기 폭파에 이은 북한의 88 올림픽 방해공작을 감시하던 중에 탐지된 사실입니다.

다. 문제점이 있었다면, 한국군측이 정보의 원칙에 따라 적의 도발은 최대치를 감안하여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언론에 노출한 것입니다.


2. 금강산땜 (임남땜) 및 평화의 땜 진행사항

가. 평화의 땜: 금강산땜 대응땜으로 1987년2월에 착공하여 1989년1월 완공

나. 금강산땜

1) 1986년에 착공한 것으로 추정하며 평화의 공사기간 중 비공개로 공사 중단 (공사 인원이 평양 축전으로 이동)

2) 10년 후 1999년 공사를 재개하여 2003년에 완공


3. 평화의 땜에 관한 후속 조치

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감사원에 감사 실시, 과잉 대응으로 결론을 내려 정치공작으로 희자 당하였습니다.

나. 그러나, 금강산땜이 수공으로 이용하지 않아도 붕괴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김대중 대통령 지시로 2002년 215M로 증축하여 2005년 완공하였습니다. (명백한 명예 회복이나 언론에 소개 수준으로 처리)


4. 평화의 땜이 제5공화국의 업적인 이유

가. 북한에서 “평화의 땜”의 엄청난 공사 속도에 놀라 금강산땜 공사를 포기하는 등 한국의 국력 (단결력, 경제력, 기술력)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나.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엄청난 열정을 세계에 전파하여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다. 북한은 세계에 반감을 무마하고자 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며 이로 인해 능라운동장, 유경호텔 및 창광거리 건설 등으로 경제를 탕진하여 “고난의 행군” 기간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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