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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매주 토요일 밤 10시 30분

강적들

대한민국 최강! 센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품격과 저품격 사이의 아슬아슬한 시사 쇼!

시청소감

시청소감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인물에 가까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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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손창호 조회수 674

그의 5번 교향곡은 그가 소련이 [혁명]으로 무너지는 것을 그린 것이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요즘도 이석기패거리잔당 인터넷조작꾼들이 인터넷정보조작으로 목숨거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경우는 심하다. 






쇼스타코비치가 쇼련공산당에 반대했다는 거의 확정적인 사실은 거짓으로 만들고 충실했다는 둥, 그런 말이 조작이라는 둥하는 소리에 우리나라공연은 왜 끌고들어오는지 그 의도는 뻔하다!



우리나라에 말그대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종북주사파들이 판판히 퍼져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애들죽이고 돈 빼앗는다는 협박질까지 이렇게 확실하게 덮힐 수가 있겠는가!




통합당 진보나 민주나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한 것은 일맥상통한데, 솔직이 진보당보다 민주당주사파들이 망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골수까지 종북주사파인, 일진회 친일파만도 못한 매국노반역자들에게 



혁명적인 파국이 있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인류를 위해서!








그런데 종북인터넷조작자들이 옛날에 말한, 쇼스타코비치에 집착한 이유를 알았다. 



13번이 문제였구나!






[대국민자녀유괴살인보복범죄예고6개월이상방송협박범]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회상록을 펴낸 구 소련 출신의 음악학자인
솔로몬 볼코프와 함께 암암리에 자신의 회고록 발간을 준비해 왔었고, 
생전에 발간이 되면 자신에게 불어 닥칠지도 모를 위험과 시련을 감안하여
철저한 보안 속에 사후 발간을 목표로 하여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회고록은 쇼스타코비치 사후 4 년 뒤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되지 마자 소련당국으로부터 <증언>의 내용자체가 거짓투성
이라며 격렬한 항의가 쏟아졌다. 
스탈린과 후르시초프 시절 두 차례에 걸쳐 공개 비판을 받고 자살 직전
까지 갔었던 쇼스타코비치.

<증언> 속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죽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자신을 포로나 사형수로 간주했다.
그 공포는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지만 한번도 사라진 적은 없었다.
온 나라가 탈출할 길이 없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독재가 들은 누구나 자기들의 예술을 관리하는 기구를 만들어 내려한다.
온 세계를 통틀어 스탈린이 만든 것보다 더 효과적인 기구는 아직 없었다.
그는 소비에트의 창조적 인물들을 전례 없을 정도로 복종시켜 끊임없이
변하는 자신의 선전 목표를 위해 봉사하게 만들었다. 이 체제의 틀 안에서는 작품 활동을 할 권리, 그리고 그에 따른 예술가로서 살아갈 권리가 공식적으로 등록되고 인정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는 스탈린의 생애와 거의 겹쳐진다.
스탈린은 1922년 소련의 첫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권력을 승계 받아 1953년 사망할 때 까지 집권 기간 중에 무려 2 천 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숙청했고, 그중 사망자만 천 만 명에 이를 정도로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른 사람인데, 쇼스타코비치는 그 얼어붙은 동토의 나라 스탈린의 통치 밑에서도 남들처럼 다른 나라로 망명도 가지 않고 음악하나 지팡이 삼아 끝까지 견디고 버텨왔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 그러나 내게도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하나는 있다. 결코 내 음악을
통해서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려 하자는 않았다는 점이다. 또 결코 그들과
<애정관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죄목을 걸어 나를
비난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들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권력에
너무 가까이 갔다고 말하지만, 시각적 착각이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 1936년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공개 비판을 위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하사의 과부처럼, 나는 스스로에게 매질을 했다고 온 세상에 선언해야
했다.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내 과거를 전부 말살해버리는
타격이었다. 미래도 함께 지워졌다.>

<스탈린은 거미였고, 그가 쳐 놓은 그물에 접근한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했다>

<혼란의 시대가 곧 닥쳐오리라. “ 캄캄한 어둠, 한 치 앞도 볼 수 없구나.
”슬퍼하라. 러시아를 위해 슬퍼하라. 울어라. 오오 울어라. 러시아 국민이여! 굶주린 국민들이여!” >

< 내 인생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내 친구와 지인들의 생애를 이야기
하다 보니까 소름이 끼쳤다. 그들 가운데 쉽고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참혹한 종말을 맞이했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었으며 나보다 더 비참한 생애를 살았다는 평가를 금방이라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나는 친구들을 회상하고 있었지만, 내가 본 
것이라고는 오로지 시체, 산더미 같은 시체뿐이다.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산더미이다. 그런 이미지는 나를 끔찍한 우울 속에 빠뜨린다.
나는 항상 슬퍼하고 비통해 한다. 이런 슬픈 작업을 그만 두려고 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 자체를 그만 두고 싶었다.
그래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 그때 나는 운이 좋았다. 수용소에 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언제라도
끌려갈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모든 일은 새로운 지도자이신 스승님(스탈린)
께서 우리 작품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 경우
역시 그가 내 음악을 어떻게 보는지가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예술과 고급
문화의 후원자였다. 그들의 주장이 곧 일반적인 견해, 대중의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와 싸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 Andre Previn 1929- )은 이 회고록을 읽고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은 스탈린 치하 러시안 지식인인 삶을 폭로하는 고발장이다
비통하고 감동적인 회고이다. 연민과 찬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회고록 전체의 내용을 단 몇 마디 말로 기막히게 요약해 놓은 앙드레 
프레빈의 촌철살인에 가까운 촌평(寸評)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이다. 너무 많은 수의 우리 국민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메이에르홀드나 (1874-1940 감독이며 배우였고 아방가르드 연극의 이론가였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그의 이름은 소련전역과 좌익 진영 서방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에르홀드는 대숙청 기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투하체프스키(1893-1937: 소련군 원수였고, 쇼스타코비의의 후원자)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나는 이런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품 하나씩을 바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을 번역한 김병화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서 쇼스타코비치에 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체제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창조적인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는 외면적인 복종과 내면적인 독립을 교묘하게 공존시켰다.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기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적응해야 했다.
그는 공산당 체제하에서 억압당하는 인간성 속의 고귀한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압살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를 강렬하게 음악으로 표출했다.
본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이 악을 공격할 수 켯을까?>람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스탈린이 자행한 모든 가치 있는 것, 러시아적인 것의 파괴에 대한 비통한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와 절친했던 영화감독 코친체프는
“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본질은 선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한 가열한 분노,
증오”라고 생각 한다 그는 이러한 분노가 러시아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쇼스타코비치는 스스로 도스토예프스키와 무소르그스키에게 가장 이끌렸던 부압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적나라한 고통과 분노가 풍자와 위트와 함께 담겨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측면을 모두 보아야 한다. 한번$비틀어 보기,
합걸음 떨어져 보기라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睾도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 전체가 이렇게 자기 주위와의 거리 두기를 통하여 유지되었다.
그는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의 진정한 감정을 담은 음악은 가장
힘들던 시기에는 연주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서랍을 위해> 작곡했고,
이런 작품들은 영화 음악이나 <살기 위해> 작곡된 공식적 작품들과 분명히
구별된다.

소련사회에서의 그의 위상은 양면적인 것이었다.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의 공식적 행동은 대부분 당의 노선을
순순히 따르는 복종적인 태도였다. 그의 여러 작품은 국가적 규모의 포상을
받았다.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당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제재와 판금 조치를 겪었고, 본인도 생계수단을 잃고 오랜 기간 공개적인 자아비판을
행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왜 이런 상반되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그의 음악이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의
구현에 충실한 것인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책의 편집자인 볼코프는
그의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그것과 정반대 방향에서 찾는다.

대규모 교향곡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중심위치를 차지하며 이런 작품이
소비에트 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련 국민들이 반드시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혁명이념
의 음악적 구현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 받는 인간의 절규와 분노를 표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략....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 자신이 정치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음악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밖에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覲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위치는 항상 정치적으로 규정되었다 
이 회상록은 그런 상황에서 살아온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용서하고 싶다는
절실한 욕구에서 쓰여 졌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빚어냈던 온갖 오해들이 그를 힘겹게 했다. 그럿 것으로 인해 고통과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 회상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약 1 놋 전 부터 무려 5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민사 소송 사건의 피고가 되어 온갖 고통과 시달림을 받아 오고 있었는데, 그동안 원고 측이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던 수용하기 힘든 부분까지 이번에 우리 회사가 대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1년간이나 끌어오던 지루한 법정 다툼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아울러 미해결 소송사건도 모두 취하되었고, 앞으로 잘 협조헬고 도와가며 원맑하게 지내기로 서로 의견까지 모았던 것이다.

회사가 한창 분쟁에 휩싸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원댄 측에서는 무슨 억하심정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열흘 동안 대형 스피카를 우리 회사 쪽으로 고정시켜 놓고 오전 8시부터 저녁 5시 까지 유행가라는 유행가는 다 동원하여 볼륨을 최대한 높여 하루 종일 틀어대는 바람에 
근 60여명에 이르는 직원들은 하루 종일 유행가에 취해 머리가 돌 지경에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원고 측은 미리 관할 경찰서에다 집회 허가를 받아놓고 대형 스피카를 동원하고 있었지만, 마이커 소리의 크기가 80 데시벨(decibel) 이상이면, 위법인 것을 잘 알면서도 2-3백 데시빌이 넘는 고성능의 크기로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틀어 재꼈으니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마이크 소리에 
듣는 사람은 거의 미칠 지경에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마이크를 이용한 시위는 10일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 나는 아침 8시 출근하여 오후 5시 업무가 끝날 때 까지 윤수일이가 부르는 < 아파트>를 비롯하여 이은하의 <밤차>, 현철의 <봉선아 연정>, <사랑은 나비 인가 봐>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를 위시하여 평소에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잡동사니 노래들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문의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듣기 싫은 노래를 날마다 듣도록 강요하는 고문(?) 또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환장하게 만들 수 있는 가공(?) 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1여 년 간 계속되는 법적 다툼 기간 중 나는 본의 아니게도 증인으로 출두
하여 위증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원고 측 사람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고, 원고측 사람들과 길거리에서 서로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원고측 사람들이 온갖 구실을 붙여 걸어오는 시비와 
언어폭행, 등 혼자 삭여내지 못해 속을 썩이거나, 스스로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분을 삭이던 일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원고 측과의 협상은 수십 차례나 서로 만나는 조율과정을 거쳤으나 서로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의견의 폭이 너무나 커서 협상은 쉬 성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난항을 거듭하기만 하던 협상이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타결이 되어 1여년 동안 서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던 법정싸움까지 깨끗이 종결 되어 원고와 피고가 서로 웃으면서 화해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이번에 협상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아예 옷을 벗고 회사를 떠나버리겠다는 굳은 다짐과 각오로 나 자신을 아예 처음부터 벼랑 끝에다 세워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비장하기까지 했던 당초의 결의와 각오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서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던 것이다. 

협상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던 날 밤,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마치 총포에 탄환을 재어 넣듯 승용차에다 총 6장의
C/D를 장전(裝塡)해 넣었다. 
6장 모두 쇼스타코비치로 채워 넣었던 것이다.

1) 교향곡 5번 작품 47.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지휘: 므라빈스키
1973.5.26일. 일본 동경 문화회관. 실황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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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향곡 7번 작품 60.<레닌그라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 므라빈스키
1953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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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첼로 소나타 작품 40: 첼로- 다닐 샤프란.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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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지휘자: Gennady Rozhdestve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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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지휘자:Evgeny Svetla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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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작품 87
피아니스트 : 니콜라에바, 타디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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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음악으로 한바탕 신나는 잔치를 벌이고 싶었던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공산주의 체제와 현실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까지 힘겹게나마 살아남아 참으로 좋은 음악들을
듬뿍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그는 흡사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을 독재와 압제 밑에서도 굴하지 않고 많은 음악들을 남겨 놓음으로써 결국 그는 인간을 마음대로 죽이고 압살하는 죽음과 공포의 체제마져도 훌쩍 뛰어 넘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슬픔과 기쁨, 때로는 
아픔까지도 음악이 대신 담당해 주는 해방구(解放口)역할 까지 너끈히
해 주곤 하는 것이다.

나는 쇼스타코비치 음악 중에서도 교향곡 5번을 최 상위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교향곡 5번의 초연당시의 상황이 그의 회고록 < 증언>에 상세히 실려있다.

<1937년 11월 21일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운명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라
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의 최상층 인사들 즉 음악가, 작가, 배우, 화가, 그 밖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명예가 손상된 이 작곡가의 <교향곡 제 5번>
초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작곡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고 가십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센세이션과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한 테러가 횡행하더라도 사교생활은 결국 계속되는
것이다.

마지막 음표가 울리고 나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주요 쇼스타코비치 작품들의 소비에트 초연이 거의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거대한 도덕적 압력
하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가 행한 노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교향곡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는 박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곡가는 열에 들떠서 미궁에서 나가는 탈출구
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그는 결국 어떤 소비에트 작곡가의 표현처럼 자기가 <이념의 가스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고압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전류이다> 교향곡 5번을
듣고 감동한 어떤 청중은 이렇게 말했다. 이 교향곡은 오늘날 까지도 
쇼스타코비치 작품 중 가장 찬양받는 곡이자 그가 자기 시대를 대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해 주는 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수십 년 지속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2주일 동안 쇼스타코비치 음악만 차에 싣고 다니면서 신물이 날 정도로 듣고 또 즐겼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내 기쁨과 슬픔의 해방구(解放口)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던 것이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 1903-1988)는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인 1937년 11월 21.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대강당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을 이끌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초연 지휘했는데,
내가 2주일 동안 싣고 다니면서 듣고 또 들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초연 지휘했던 므라빈스키가 40년 뒤인 1973년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동경 문화회관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함께 녹음한 실황연주 음반이었다.

백열적(白熱的)인 연주란 이런 연주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이 연주음반속에는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듯하다.
그의 슬픔과 ,분노, 아픔과, 희망, 그리고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해 흘렀던
끝없는 절망까지 모두 들어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 연주반을 들을 때마다. 3악장의 그 정밀(靜謐) 아름다움
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이 악장을 어찌 잠시나마, 한눈을 팔면서
외면할 수가 있을 것인가.

4악장, 온통 전신을 덮쳐누르듯이 쏫아져 내리는 격렬한 오케스트라의
굉음(轟音)은,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을 인격체가 아닌, 마치 기계부품인양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흡사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을 그 숨막히는 소련 독재 체제를 향해 내 지르는 쇼스타코비치의 분노에 찬 돌 팔매질
같이만 여겨져서 이 악장을 들을 때면 때로는 통쾌하다는 느낌까지 받곤 
하는 것이다.

나는 쇼스타코비치가 소련 체제에 협조를 잘해준 덕분에 살아있는 동안
잘 먹고 잘 살수 있었던 행복했던 음악가중 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적이 없다.

<나는 결코 내 음악을 통해서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려 하지 않았다.
또 그들과 <애정관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죄목을 걸어
나를 비난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들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권력에 너무 가까이 갔다고 말하지만, 시각적 차이이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어디선가 쇼스타코비치의 항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쇼스타코비치는 솔로몬 볼코프를 통해 그의 자서전 <증언>을 펴내게
함으로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오해의 일단을 풀 수 있는
기회와 실마리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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