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동안 조선은 완벽한 고립 상태였다. 북쪽으로는 중국이 가로막고 있었고 바다 건너 왜하고는 별 교류가 없었다. 조선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고 그 시간을 지배한 것은 중국의 유학과 역사였다. 한나라 고조의, 명나라 태조의, 당나라 또 누구의 죽은 '말씀'이 조정을 다스렸다. 조선이 아는 건 중국밖에 없었고 아무리 뛰어난 지식인이라도 그 시계(視界)가 중국 대륙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망했고 덜컥 해방이 되었다.
조선은 신진 정치 세력이 정권을 갈아치우면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침략으로 망했다. 새로운 정치 이념이 등장하면서 끝이 난 것이 아니라서 해방이 되고도 대한민국의 사회적 정서는 조선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게 사대부의 나라와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다. 박정희의 5·16 혁명은 단순히 고려 무신 정권 이후 700여 년 만에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아니다. 5·16은 사농공상의 위계질서를 뒤집어 공업과 상업이 전면에 나서 나라 발전을 이끈 경제 혁명이다. 말로 세상을 다스렸던 사대부는 기세를 잃고 뒷전으로 밀렸다. 공론을 일삼는 무리가 주춤하는 동안 우리는 선진국 입구에까지 진입했다.
소생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역동적인 시기가 끝나간다는 얘기였다. 조선이 이념적으로 망한 것이 아니었기에 다시 사대부의 망령이 깨어나고 사농공상의 중세적 세계관이 꿈틀거린다는 얘기였다. 우리 사회에서 직업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이토록 노골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머리의 노동과 몸의 노동을 가르고 후자를 밑으로 보는 고약한 발상 역시 마찬가지다. 징후는 여럿이다. 젊은이들이 관리가 되는 길로 몰려가는 것은 나라가 망할 전조 현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펜대 굴리는 직업에 대한 선망이라는 고유한 정서로의 회귀다. 관료들이 규제라는 이름으로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대부 정서의 한끝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도 별로 달갑지 않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사대부의 정신세계가 인문학이다. 조금 먹고살 만해졌다고 다들 양반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다. 나를 제물로 삼자면, 이런 시시한 글 좀 쓴다고 사회적인 대접이 달라지는 이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만들고 팔고 개발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제대로 된 선진 민주주의 사회다. 우리 안의 조선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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