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존재해선 안될 귀태 일 뿐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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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6권백중 조회수 1236 | |||||||||||||||
자!
이제부터 박정희의 실체
개 봉 박 두!
고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대표 <한겨례 인터뷰>
-박정희와 장준하,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박정희의 실체를 보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이름을 두번이나 바꿨다. 첫번째 창씨개명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 이름을 따라 또 이름을 바꿨다. -----------------------------------------
박정희는 밥을 많이 지어 놓은 모범적인 대통령이라고 이야기 된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박정희는 미래의 남의 장작까지 미리 사용해서 밥을 해놓고 생색낸 대통령이라고 평가 받아 마땅하다."참여정부 정책실장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내놓은 박정희 정권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다.
강남개발이전
한국인들은 국민 전체의 81%가
자기집에 살! 았! 다!
▲ 1955년, 한 중학교 학생들의 소풍 장면.
'아파트 전세'의 종말, 우리는 왜 그 고생을 했나"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내집이 없다. 주택보급률이 100 % 를 넘는데도...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 101.2%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이 소폭이나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의 자료를 보면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108%인데 비해 자가소유율은 60%이다. 1990년에는 전국 주택보급률이 72.1% 였고 자가소유율은 50.6%였다. 자가소유율의 경우는 70년 68.2% 이후 계속 떨어져 90년에 50.6%까지 떨어지다 2000년 54.2%로 높아졌다. 주택보급률은 지속적으로 올라갔지만 자가소유율은 반대로 떨어져 30%~40%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입력: 2011-07-24 17:21 / 수정: 2011-07-25 01:52 [통계로 읽는 경제]
빈집·미분양도 주택수에 포함…'주거의 질' 반영 못하는 한계도
부동산 침체 핵심은 ‘집값 내림세’
----------------------------------------------------------------------------------- [서울의 재발견] 서울에 남아 있는 6.25 전쟁과 냉전의 흔적 ①노컷뉴스입력2013.06.24 06:03수정2013.06.24 09:33 [CBS 이진성 프로듀서] 강남 개발은 이런 안보 위기감 속에 충분한 기반과 토대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강남을 개발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속도전을 내야 하니, 이때 정부가 사용한 방식이 '개발 이익을 활용한 땅 장사'였다. 정부가 땅주인에게 땅 일부를 받아서 개발한 뒤, 주변 땅 가격 폭등을 야기시켜 땅 주인에게 이득을 챙겨주고, 정부도 개발하고 남은 땅 그러나 가격이 덩달아 폭등한 그 땅을 팔아서 개발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강북 도심에 난립해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하나로 모아서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만든 것도 강남 이주 유도 정책 중 하나였다.
수십만평 강남 땅 투기로 박정희 비자금
(서울시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을 역임한 손정목씨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중에서)
박종규 경호실장이 어느 정도 권력가였는가를 알고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1974년 8월 15일에 있은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박종규가 경호실장을 그만둘 때까지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3인의 실권자가 있었다. 김종필,이후락 그리고 박종규였다. 김종필은 대권을 향한 욕심이 있었고,이후락은 실권자이기 위한 노력이나 공작등이 있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오직 대통령 한 분에 대한 충성이 있을뿐이었다. 아무튼 다른 야심이 없었던 만큼 그 권력은 더욱 큰 것으로 비쳐졌다. 박종규 앞에서는 모든 장관이 바짝 긴장을 했다. 언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종규는 1930년생이었으니 1929년생인 윤진우(서울시 도시계획과장)보다 나이는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그릇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박 실장은 실질적인 제2인자였으니 윤진우가 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진우 과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먼저 그 집(박종규의 집)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던 호랑이 표범 가죽,박제가 된 큰 악어 등이었다. 아마 외국을 다녀온 고관들이 귀국할때 갖고와서 선물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응접실 창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면에 한강이 있었고 그 대안인 압구정동에 현대건설에서 시행하고 있던 매립공사 장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박종규 실장의 질문은 간단 명료했다. 헬리콥터로 돌아본 지역(과천-서초-강남-잠실)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것이었다.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 강남구가 된 일대의 지역이 가장 유망한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그쪽 땅을 사모으지" 라고 했다.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후,윤 과장이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모으라"는 것이었다. (중략)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서 갖다 바친다. 이 사실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김현옥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의 그의(윤진우) 흥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 3.4 공화국시대의 청와대의 권한, 그것은 바로 생사여탈을 자유자재로 하는 절대권력이었다. 윤진우는 '그 어른에게 잘 보이면 출세길이 훤하게 뚫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중략) 이 일을 윤진우에게 하명한 박종규 경호실장, 김현옥 서울시장은 성격이 치밀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윤진우는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패가망신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식 장부는 만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메모로 남겼다. 그 메모를 정리하면 자금의 흐름을 어느 정도까지 재현할 수 있다. 다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것을 재현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5월 20일 현재로 그가(윤진우) 청와대 정치자금분으로 매입한 토지가 23만 7,366평, 동원된 토지대금이 12억 7,088만 5,250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메모를 통하여 그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도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다. 자금회전 등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윤진우에게는 신바람이 나는 나날이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돈을 풍족하게 쓸 수 있었다. 토지매입 자금 중 3%는 판공비로 쓰도록 지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구입하게 되면 사전에 양해된 사람 명의로등기이전도 해야하고 또 땅을 매각할 때도 소유권 이전에 따른 제반 수수료 등 경비가 들게 마련이었다. 뒤에서 설명하는 상공부 자금을 합하여 1970년 상반기에 그가 썼던 자금의 총액수는 20억 원을 훨씬 넘었다. 20억 원의 3%는 6천만 원이다. 1970년 하반기에 서울시가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했을 때의 평당 가격 평균이 14만2천 원, 40평짜리가 571만 2천 원이었다. 현대.대림.동아건설 등 큰 건설회사가 중앙정보나 서울시 국장들에게 연말과 추석에 돌리는 떡값이 겨우 10만 원짜리 수표 한두 장이었으니 6천만 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물론 그 중에 상당한 액수가 필요경비로 쓰였지만 떨어지는 금액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신나는 일은 승진이었다. 경북지사로 있던 양태식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것은1970년 4월 16일이었다. 양 시장 부임 2주일 후인 5월 2일에 윤진우는 도시계획국장으로승진 발령되었다. 즉 토지매입.매각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간에 과장에서 국장이 되었으니 신바람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오해를 할까 두려워 여기서 이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 강남 토지투기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좀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관여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에게 맡겨둔 적금통장에서 최초의 자금이 나왔으니 이후락 실장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김정렴 상공부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은 1969년 10월 21일이었다. 김 비서실장은 취임 직후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아마 박종규 경호실장이 매사에 치밀한 김 실장에게 이 일의 처리를 부탁했고 소심했던 김 실장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일 처리 자체가 김 실장 몫이 되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치자금이 조성되어 그것이 대통령에게 바쳐진 마지막 단계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시대 즉 제3.4공화국 당시에도 정치자금은 여러 경로로 수합되었다. 다만 박 대통령은 기업가로부터 직접 상납을 받지는 않았다. 돈에 대해서 결벽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3.4공화국 시대의 정치자금은 주로 공화당 재정위원장,경제기획원 장관,서울특별시장(김현옥,구자춘) 등이 마련했고 연말과 추석때 대기업에서 가져간 정치자금은 반드시 비서실장을.경호실장을 경유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 前도시계획국장 손정목씨 개발비화 책 펴내
'朴대통령 워커힐 나들이 위해서 청계고가 세워"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손정목(75.전 서울시립대 교수)씨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의 '증언'을 담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 전 5권)를 냈다.
이 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선에 대비해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합뉴스 2003-08-18) *손정목: 1928년 경북 경주 출생,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역임,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서울 시립대 교수,대학원장. ========================
'8학군'으로 상징되는 입시 과열 현상
강남 8학군은 과연 어떻게 탄생되었나?
강남 이주 유도 작전의 결정판은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서울의 명문 고교들은 모두 종로구와 중구에 입지해있었다.
한명회·박정희·이명박, 특별히 사랑했노라 오마이뉴스 | 입력2010.11.23 10:17 | 수정2010.11.23 14:47 한남대교는 강북과 현재의 강남구를 연결하는 첫 번째 한강다리였다. 한남대교가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강남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일대의 땅값은 거의 천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자고나면 땅값이 쑥쑥 오르는 '말죽거리 신화'가 이때 만들어졌다.
압구정동 일대에는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배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197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배밭을 밀어버리고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했다. 봄이면 배꽃이 만발하던 곳에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강남 특권층'도 이때 함께 탄생한다. 1978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한국도시개발은 압구정동에 사원용 아파트 900채를 지어서 그 중 600채를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특혜로 분양하는 불법을 저지른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의원도 관계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특혜로 분양을 받아서 현대아파트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런 고위층들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모이면서 '강남 특권층'을 형성한 것이다. 강남 8학군도 이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고급 신축아파트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학교가 없으면 학부모들은 그 지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강북에 있는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놓는다. 강남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는 기존의 명문고를 옮기는 것이 강남부자들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강남 특권층과 함께 만들어진 8학군 군사정권이라도 학생들이 멀쩡하게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강제로 이전 시킨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 측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권의 설득과 합의 끝에 결국 1976년 경기고가 첫 번째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강북 경기고 부지는 이후에 정독도서관으로 변신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78년에는 휘문고가 경기고의 뒤를 이어서 강남으로 내려왔다. 1978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강북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할 경우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철권을 휘두르던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으니 학교 측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에는 숙명여중고와 서울고, 1984년에는 중동고가 강남으로 각각 이전한다. 이렇게 해서 강남 8학군이 조성된다. 백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의 모교인 배재중고교도 1984년에 중구 정동에서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변두리로 내려오게 된 당시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학교 이전 문제에 있어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같은 것은 아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8학군에서 명문대학 합격자의 수가 많아지자 위장전입의 문제가 생겨났다. 위장전입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녀의 교육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위장전입이라는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워낙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위장전입에 대한 불감증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위장전입도 그렇지만 8학군 자체도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강남으로 이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 정원을 초과해서 학생들이 전입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때는 서울시내 과밀고교의 절반이 강남지역에 몰려 있을 정도였다. 35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현대아파트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가
중요한 이때, 고대한성백제 유적이 지천
에 깔려있었던 고대한성백제의 수도였던
강남,,,,,,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는 이 때. 서해바다를 자신의 앞마당 처럼 여기며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대 한성백제의 실체는 그 유적과 기록의 적음으로 인하여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그리 하여 오늘날 고대 한성백제 유적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 가 없다. 그런데 이 고대 한성백제의 중심지가 바로 오늘 날 강남일대 였다.
강남 8학군과 뭉개진 한성백제 유적
▲ 아시아의 로마제국이였던 고대 한성백제의 영역
‘강북의 눈물’ 위에 핀 강남8학군
(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토성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을 두른 이 토성은 이것이 있는 장소를 따라 삼성동토성이라 일컬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성벽 은 350m 가량 남아 있었다. 애초 성벽은 그 둘레가 460m 정도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초반 이곳을 답사했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는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BC 18~AD 475년) 기 와 몇 조각을 줍기도 했다. 그 동쪽 2㎞ 쯤 떨어진 한강변 풍납토성처럼 성벽을 흙으로 쌓아올렸고 기와조각까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유적임은 분명했고 더구나 기와건물까지 있었음에 미 뤄 백제가 이곳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성동토성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종로구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경기고 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다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성백제를 깔아뭉갠 곳에서 과연 학생들에 게 '우리 문화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지... 어떻든 귀중한 한성백제 유적 1개는 이렇게 해 서 뚝딱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한강 북쪽과 맞닿은 뚝섬 경마장 자리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토루(土壘)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고 강동구 암사동 소산 이라는 해발 88m 야트막한 산에도 역시 토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파편조차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서영영 사라진 삼성동토성에 비하면 풍납토성은 나은 편이다. 비록 성벽을 포함해 22만 3천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벌집처럼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와 연립주택,상가에 짓눌려 신음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숨통은 붙어있기 때문이다. 삼성동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렇게해서 겨우 살아남은 한성백제 유적이라고는 그나마 잘 정비된 몽촌토성과 뼈대만 남은 풍납 토성, 그 맞은편 아차산성, 석촌동고분군 정도 밖에 없다. 이 중 몽촌토성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일로에 있다.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에도 대단히 중요한 아차산성은 곳곳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들돌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전형적인 고구려식 모양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에는 이들 무덤 주위에서 기와조각까지 발견돼 백제 당시에는 무덤 위에다가 사당 건물을 세워 제사를 지냈음이 이형구 선문대 교수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남위례성터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넘어 풍납토성이 왜 꼭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유적 보존가치를 꼭 희소성이라는 경제학 원리로 따 질 수만은 없겠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 여부를 떠나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초기백제 유적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보존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0/05/26
‘말죽거리 신화’라고 하는 강남지역 땅값 폭등과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린 복덕방과 복부인,
강남지역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밤문화,
8학군의 등장과 아파트 가격상승 및 사교육 열풍의
진앙지인 강남,
그리고 뭉개진 소중한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들
강남이라는 말 자체는 한강 이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강남구와 송파구, 서초구 등의 지역만을 의미한 강남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영동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됨
박정희 시대
이때부터 강남 한성백제 유적은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 ...
박정희가 도시계획 모형전시관을 관람하는 모습. 1969년. 이제 강남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는데....
강남 신사동의 개발 모습....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기 시작함. 1968년 10월 15일 반포아파트 와 강남지역의 일부가 완성. 1972년 5월 25일 잠원동의 과거 모습. 그 유명한 압구정... 근데... 농부가 소로 밭갈고 있음...1978년. 88 올림픽 개최로.... 강남 경제는 더더욱 촉진되기 시작하며 요즘에도 볼수 있는 현대식 건물이 더더욱 들어섬. 강남구 삼성동. 1989년. 건축중인 그랜드인터컨티넨탈서울, 한국종합무역센터가 드디어 건설됨. 현재의 강남 현재의 강남은 땅값과 인구밀도, 건물 위치까지 절대적인 포화상태라고 말할수 있음. 엄청난 땅값을 자랑하는곳중 하나가 되어버림.
그러나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 이것이 사라진 백제의 위례성일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97년 풍납토성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신호탄으로 우리 역사학계 최대 발굴로 비유할만큼 엄청난 양의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학계에서 그동안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사 500년의 미스터리는 물론 우리 고대사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간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마구잡이식 개발로 뼈대만 남은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수도 위례성이다. 그러나 이 풍납토성도 현재 개발로 인한 파괴일로에 있다. 지금 한창 발굴 중인 곳은 풍납토성에서 서북쪽 방향 미래마을 연립이 있던 구역이다. 현재 발굴 지역에서 유물이 나오고 있는 곳은 지하 1미터에서 4미터의 지층, 모습을 드러내는 유물들은 거의 원형에 가까웠다. 바로 이것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돌무지 무덤이다. 형태는 고구려 무덤(장군총)과 같다.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 고분 80여 기가 흩어져 있었고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을 '돌마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개발로 파괴되어 사리지고 3기의 고분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었다. 그러나 정권유지를 위해 부동산을 폭등시켜 그
차액을 챙기려던 박정희는 강남개발을 밀어붙이며 강
남 일대에 산재해있던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을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대한민국 고대사 유적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이때에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말해 줄 소중한 역사 유적은 이렇
게 사라져 버렸다.
◈ 박정희 경제기적의 허구.
대한민국의 경제를 전부 박정희가 이루어 낸 거다?? 제대로 된 경제학자에게 다 물어 봐라. 그 말에 동조하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다. 경제학자 강기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에 따르면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이었다. 박정희 경제가 꼴찌였다.
박정희시대 경제지표들 정말 대단하다! 박정희는 정말 통이 컸다 말아먹을 것 확실히 막아먹을려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않좋은 것들은 죄다 최고기록을 했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기위해 어떻게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어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마도 아래의 신기록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을 해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77년 12.1% 78년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만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비투자비율, 소득분배율, 실업률] 기업의 설비투자비율 11.7% 역대4위 노동소득분배율 43.7% 역대최하위 79년 실업률 17.9% 역대최고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이었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불행중 약간이나마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유지목적으로 한국민족의 대일청구권을 모조리 포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러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전투수당마저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찬양받아야 할 일이라면 박정희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훨씬 더 찬란한 경제를 이루어 낸 독일의 히틀러와, 러시아의 스탈린, 대동강 기적을 이루어 낸 북한의 김일성(지금은 쫄딱 망했지만), 30년 이상 중국의 경제를 년 약 10%의 성장을 이루어 낸 중국의 지도자들은 더욱 찬양을 받아야 하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강국까지 올려 놓은 김대중과 노무현은 무슨 찬양을 해야 하나?? 박정희가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두환경제도 있고, 김대중.노무현경제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박정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말도 웃긴다. 100명의 학생 중 꼴지의 학생이 60-70등 하는 것이 쉽나? 10등의 학생이 5등 하는 것이 쉽나? 개방을 하고 국제환경 등이 맞아 떨어지면 박정희가 없어도 경제는 꽃이 핀다... 러시아, 베트남, 인도, 남미의 나라들을 한 번 보시라. 캄보디아는 년 1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하기도 한다. 싱가폴, 대만, 홍콩, 일본 등은 박정희가 없어도 크게 성장했다. 우리나라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역사를 정략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통뼈인가? 박정희도 초기 5년간은 약 5.5% 정도로 이승만 후기와 비슷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박정희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실적
이승만 12년집권 -15억$적자 67 -> 82 박정희 18년집권 - 233억$적자 82 -> 1,636 세계 4위 외채국 만듬. 죽기전 한국의 석유재고 7일분 남아 있었음. 죽기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섬. 역대 대통령중에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대통령은 김영삼 박정희 뿐 어떻게 해서 박정희의 무능력이 능력으로 미화가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전두환 7년집권 + 8억$최초흑자 1,749 -> 4,268 세계 4위 외채를 30억 달러까지 줄임. 박정희 사후 불어닥친 국가부도 위기를 일본에서 40억달러를 구걸해와서 부도를 막았음 노태우 5년집권 - 132억$적자 4,268 -> 7,811 김영삼 5년집권 - 366억$적자 7,811 -> 7,355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에 영남의 마지막(부산경남) 양심을 팔어버림. 국고에 39억달러 남기고 물러남. 금융거래불량자(신불자)1997년말..200만. 국가부도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하락시킴. 1997년 12월 3일 IMF와 비밀리에 기업매각 헐값계약서 작성함. 김대중 5년집권 + 846억$흑자 7,355 ->12,646 신용불량자 65만 늘어난 2002년 말..265만 기록. 독재산업화 세력이 말아먹은 국가경쟁력 41위ㅡ> 29위 역대최고 기록. BK21사업으로 과학기술경쟁력 28위ㅡ> 12위까지 상승시킴.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 세계4위 외채국 만든 한국을 국가부도 걱정없는 1200억 달러 세계 4위 외환보유국 만듬.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이 말아먹은 10단계 추락한 국가경쟁력.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상승시킴. 1999년 9월부로 대한민국을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만듬.
대한민국 경제사를 국민에게 안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박정희는 전두환보다 못하며 오히려 김영삼과 동급이다 수치 통계는 (대한민국 통계청 공식기록) 자료출처: KOSIS 경부고속도로의 업적 ? 일본넘들에게 협상금 받아 처먹고 18년동안 통치하면서 그정도도 안했으면 정말 버러지 중에서도 상버러지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 .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씨-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 총장 이필상씨-
(수구)신문을 읽을 때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보도와 해설을 보면 신흥종교 단체 기관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한성대 총장-
김재규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과 같은 급의 인물이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 김정일체제와 같은 암흑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 최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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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까닭은?
3선 시기까지의 경제 성장에 대해선 박정희의 능력을 인정. 물론 이 시기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계획은 2공화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그대로 써먹은 거지만. 플라자합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되고, 플라자합의의 내용이던 엔화 가치 상승. 달러 가치 절하. 저금리 등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대박을 던져줌.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저가 시장에 한국이 들어갈 수 있게 했고, 달러 가치 절하는 외채가 달러로 계산되니 가만히 앉아서 빚이 줄어든 격인 데다 달러 가치 절하에 따른 원화 가치 상승은 수입 원자재에 대한 부담금도 크게 줄여버렸음. 거기다 저금리 덕에 단기 외채의 이자 부담도 팍 줄고 여기다 80년대의 저유가가 겹치니 로또 중의 로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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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5 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국민의 주택 보유 비율은 55 퍼센트로 떨어졌다. 박정희 시대
이때부터 강남은 본겨적으로 파괴되기 시작 ...
박정희가 도시계획 모형전시관을 관람하는 모습. 1969년. 삼성동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 아파트 숲에 잡겨버린 서초 · 송파 · 강남 일대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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