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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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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하는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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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6정은정 조회수 587

제가 기억하는 안철수씨는 92-95년까지의 안철수입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같은 지면(당시 한국경제신문과 월간 PC-Line,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에 같이 글을 쓰던 인연으로 

몇번 본적이 있습니다. 저랑은 학번이 많이 차이나기도 했고 안철수 선배 자체가 워낙에 내성적인 성격인 면이 많아서 인지

같은 쪽 일하던 사람들과의 교류도 적은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IT업계가 당시에는 정말 좁아서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끼리는 다들 교류가 있었던 때였고 유일한 통신 망이었던

kETEL에 안철수씨는 일찌감치 V3로 이름이 알려진터라 그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많기도 했습니다.


제 기억의 안철수씨라면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참 내성적이다, 그리고 원칙적이다라는 것 정도입니다. 편집기자가 안철수씨의

원고 편집에 상당히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담당 기자 이름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후에 이찬진씨의 한컴으로

직장을 옮길 때까지 개인적으로 상당히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 그 사람을 통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이찬진씨와 비교하여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안철수씨의 당시 프로그래머 혹은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은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업계 사람들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IT업계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미약할때라 99프로가 다 불법 복사되고 있었던 때여서 사실

상업적으로 프로그래머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 유일하게 벤처에서 성공한 기업이라면 대표적인 것이 한컴과, 안철수연구소였는데 두 기업은 전혀 상반된 길로 성공을 거둡니다.

우선 한컴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상당히 높은 가격에 프로그램을 판매하여 성공을 합니다. 성공의 바탕에는 copy lock에

상당히 공을 들여서 불법 복사를 방지하여 일반인으로의 셀쓰루 방식을 택했고 어느정도 성공합니다. 2.x버전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는 parallel port를 이용한 hardware 방식의 copy-protect를 적용합니다. 당시 21만원정도의 소프트웨어 가격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 부들부들할 정도의 악랄한 방식이었죠. 2.x버전은 아마 처음으로 true type font(혹은 out line font라고 불리우던)를 적용한

버전으로 굉장히 센세이션한 패키지였죠.


어쨋든 이러한 방식 덕분에 당시 한컴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후에 보석글등 기존에 행망 표준이었던 프로그램들을

밀어내고 우리나라의 대표 워드프로세서로서 자리잡게 되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전 국민의 90프로가

한컴의 아래아한글을 사용함에도 정부에 보급되어 있던 행망용 워드프로세서는 훨씬 질이 떨어진 프로그램이었는데 이것을 소프트웨어의

기술력으로 넘어선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안철수 연구소는 조금 다른 길을 갑니다. 국민을 상대로 무료 배포로 성공한 기업이죠.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관공서와 일반 기업체에는 유료로 판매하여 성공하게 됩니다. 그중 상당 부분은 정부와 정부관련 기업이었습니다. 안철수 연구소를

세웠을 당시는 상당히 V3의 기술력은 우수했으나 그 경쟁력은 점점 떨어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당시의 미국 잡지인 PC-World에서도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미국의 copuserve나 일본은 nifty serve등에서도 v3의 자취는 점점 사라지게 되지요.


일반인의 눈으로 볼때는 안철수연구소가 상당히 고마운 기업일 수 있으나 다른 편에서 보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후발업체는 안철수 연구소가 장악한 덕분에 더욱 훌륭한 엔진과 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생력을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부분은

안철수 연구소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봅니다.


'공짜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뿌려 놓음으로서 후발 주자의 생계를 막막하게 하였고, 정부부처를 상대로는 수십년간 거의 독점을

하다 시피 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가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이는 후에 인터넷이 보급이 되고 패키지를 팔지 않아도 다른쪽으로의

수익이 가능해지며 몇몇 프로그램이 나타나긴 합니다.


이때 상당히 업계에서 말이 많았던 것이 안철수 연구소 설립당시부터 이미 정부에서 일하는 학교 선후배들과 어느정도 밀어주겠다는 교류가

있었지 않나 하는 것이 업계에서 돌았던 많은 썰 중에 하나 입니다.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하기 직전 그의 부인과 담당 기자와 함께 밥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부인분께서 '이 사람 좀 제발 말려 달라고 울먹였던 게 기억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안철수씨는 개업을 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고 부인분은 페이닥으로 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안철수씨도 불확실의 상태에서 상당히 어려운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안철수 연구소 설립후의 행보를 보면 어느정도의 확신은 있었던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후에 아 이분이 생각보다 관료들과 어느정도의 교류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물론 이는 팩트가 아닌 당시 업계에서 

떠돌던 썰입니다.


정부에 전자결제시스템을 제공했던 핸디소프트를 비롯한 다른기업들도 사실은 정부 관료들의 줄을 이용해서 회사를 키웠고, 당시에는

그러지 않고선 IT업계가 살 길이 막막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새벽에 잠이 깨서 그냥 생각나는대로 끄적이다 보니 글이 두서가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겁니다.


1. V3가 그렇게 천사표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것.

2. 안철수씨는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었다는 것. 몇차례 그런 사례가 있긴 한데 얘길 빼먹었네요.

3. 안철수연구소는 정부 friendly한 기업이었다는 것.


저도 한때 프로그램을 좀 만졌던 사람이고 그쪽 업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씀을 보태자면 알고리즘을 만들고 플로차트를 그릴때의

프로그래머는 정말 머리를 완벽하게 써야 합니다. 특히나 당시 DOS의 640kb라는 메모리의 한계는 정말 군더더기 없는 프로그래밍 실력을

요구했기에 지금 보다 훨씬 난이도 높은 작업이 바로 그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통신 망에서 퍼지기 위해서는 2400bps라는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통신 속도 걱정까지 했어야 하니까요.(혹시 딴지거시는 분이 계실까봐 .. 처음에 1200부터 조금씩 올라가긴 했습니다)


안철수씨는 그런면에서 앞뒤 생각 확실히 계산적이리라고 봅니다. 그건 프로그래머로서의 기본 미덕이기도 하구요.

출마선언과 사퇴선언 그리고 탈당에 이르기까지 그가 '강철수'가 아니라서 그렇게 해왔다고 전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이직의 IF를 활용한

플로우차트를 여럿 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input과 output 코딩도 있었겠죠.


적어도 제가 봐왔던 그 시절의 안철수라면 정말 꼼꼼한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정도만 갔었던 그였습니다.

아주 사사로운 것 하나도 원칙을 어기는 일을 본적이 없습니다. 껌 종이 하나 쓰레기통이 없으면 주머니에 넣던 사람입니다.


그런 반면에 또 사업체의 확장에서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던 그였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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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 CHOSUN 박병선 2017.04.09 17:13

    어쨌거나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과 성공의 기술을 안다는 데에 점수를 주고 싶군요. 국가경영에서도 성공의 기술이 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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