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마음 꿰뚫는 욕심쟁이 애어른
70년대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제주도 아가씨' 혜은이. 소녀가수로 출발해 지금껏 무대를 떠나지 않는 그녀는 '애어른'으로 통할만큼 속이 찬 가수이다. 가족들을 부양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돈보다는 노래가 좋아 아직도 무대에 서고 있다. 쇼 MC 최성일씨의 회고담으로 엮는다.
'제주도 아가씨'
혜은이의 본명은 김승주(金承珠). 지금은 작고한 그녀의 아버지 김성택(金星擇)씨는 변사출신으로 50년대의 지방 쇼 단체들 중 가장 막강했던
'낙랑(樂浪)악극단'의 단장이었다. 어머니 정순실씨도 이 악극단의 연극무대에서 줄 곧 여주인공으로 활약했던 배우였고 혜은이는 '소녀가수'로서
어려서부터 일찍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낙랑 쇼 단'은 이제 없어졌지만 이 단체가 배출한 유명연예인은 가수 고봉산 안다성,
코미디언 故이기동 남성남 등 쟁쟁했으며 나도 사회자로서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윤복희(尹福姬)도 '낙랑 쇼 단'출신의 소녀가수였는데 그녀가
아버지 윤부길(尹富吉.작고)씨와 한창 이곳에서 노래했을 때만 해도 혜은이는 엄마 젖을 빨던 갓난아이였다.
젖먹이 시절 혜은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울보'였다. 아무리 저을 물리고 달래도 마냥 앵앵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고 김성택씨는 가끔씩 열이 받친
나머지 “저걸 그냥 갖다 버려라!”하며 신경질적으로 고함치기까지 했다. '어려서 많이 울면 가수 된다'는 속설이 맞는 얘기라면 혜은이가 훗날 톱
가수로 출세한 진짜 비결은 어쩌면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녀가수'의 관록을 등에 업은 혜은이가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히트치며 당대 톱 가수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때는 지난 76년. 이듬해에는 '진짜 진짜 좋아해' '뛰뛰 빵빵' 그리고 1978년에는 '감수광' 등
그녀의 히트곡은 끝없이 줄을 이었다. 이와 함께 김영호(金瑛鎬)단장이 이끄는 'AAA'쇼 단이 전속되어 쇼 무대에서도 70년대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이 기진맥진하던 'AAA' 쇼 단이 혜은이를 잡음으로써 기사회생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혜은이만큼 '모전여전'(母傳女傳)을
여실히 증명시킨 딸도 없을 것이다. 걸핏하면 몸이 아파서 자리에 눕는 것부터 마치 시골처녀 같은 새침데기의 행동거지, 도통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품에 이르기까지 체질 행동 성격 모두가 어머니 정순실씨를 그대로 쏙 뺐다.
그녀의 '내성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는 해프닝 하나.
1977년 9월 충북 청주(淸州)의 '혜은이리 사이틀'때였다. 하오2시 공연시간이 다가오는데 갑자기 혜은이가 숙소로부터 “아파서 도저히 공연을
못하겠다.”는 일방통고를 해왔다. 공연 단은 “또 아파, 젠장!”하고 투덜투덜 거리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사업부장이 조간신문을 들고
분장실에 불쑥 나타났다.
신문을 펼치니 거기에는 혜은이가 '모래 탑' '나를 두고 아리랑'의 미남가수 김훈(金勳)과의 밀애설이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있었다. 즉 그녀는 아파서 공연펑크를 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런 얘기가 신문에 나서 사람들이 다 봤을 텐데 창피해서 어찌
무대에 설 수가 있느냐?”며 여관에 틀어박힌 채 밖을 나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영호 단장은 “그건 그거고 공연은 공연 아니냐 스캔들과
공연은 전혀 무관하니까 어서 공연은 하자!"고 설득작전을 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펑크는 막을 수 있었으나 워낙 혜은이가
수줍음을 타는 내성적인 타입이라서 설득하는 김 단장이 무진 애를 먹었다. 평소 말이 없는 '침묵형'이었지만 내면에는 '커다란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또한 혜은이였다. 70년대 말 그녀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었고 '관객동원=혜은이'였기 때문에 극장마다 객석은 항상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무렵 경남 진해(鎭海)에 공연차 도착하였을 때였다. 극장 앞에 관객이 엄청나게 몰리는 것을 보고 김영호 단장은 극장측에
보다 많은 '수입배당'을 요구했다. 그러나 극장측 대표가 이를 딱 잘라 거부하자 성격이 괄괄하기로 이름난 김 단장은 즉각“오늘 공연 안
해!”하며 강경 자세를 취했다. 극장측도 “좋아, 너희들하곤 안 해!”하고 팽팽히 맞섰고 그리하여 김단장은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공연을
취소하고 곧바로 다음 공연목적지인 마산(馬山)으로 떠나 버렸다.
그 때까지 말 한마디 없던 혜은이는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버스
안에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이, 단장님. 극장 앞에 관객이 많았잖아요. 웬만하면 꾹 참고 공연하시지 왜 캔슬하고 마셨어요. 어휴! 돈이
아깝지도 않으세요. 그 돈이 얼만데..”
김영호씨는 너무나 아쉽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혜은이가 기특했던지 “아니, 그럼 공연하자고
거기서 그러지 뭐 하러 버스 떠난 다음에 얘기 하냐?”며 빙그레 웃었으나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후에도 김단장은 불같은 성미 때문에 자주
극장과 대립하고 다투었지만 혜은이의 '돈 욕심'을 말해주는 이 '발언'을 계기로 성질을 꾹꾹 누르고 가능하면 공연은 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곤
했다.
혜은이는 누가 봐도 깜직하고 귀여운 인상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비스킷을 사 주면 좋아할 것 같은'아이'처럼 보이지만 실상
속은 중년남자 못지 않게 세상물정에 훤한 어른이나 다름없었다(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언젠가 '애어른'이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1979년 4월 그녀의 고향인 제주의 '시공관'에서 '혜은이 2차 리사이틀'의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서였다. 어렸을 적부터 오래
공연생활을 해왔던 터라 그 누구보다 쇼 단원들의 실정을 잘 헤아렸던 그녀는 단원들의 뒤풀이를 위해 성큼 '수고비'를 내놓았다. 직접 밴드
멤버들에게 고기와 술값에 쓰라고 약 20만원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유독 나한테는 밴드 전체의 수고비와 같은 20만원의
거액을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조금만 주었더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워낙 많은 돈을 주길래 몹시 의아해 한 나는 혜은이에게 “하필
나한테만 왜 이렇게 후하게 주는 거냐?”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혜은이의 답변이 아주 걸작이었다.
마치 무슨 모의나
꾸미듯이 속삭이면서 “에이, 최성일아저씨두. 모처럼 제주도에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술 한잔에 식사도 푸짐하게 두시고요. 또, '여자구경'도
하세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술도 걸치고 여자도 사서 즐겨라'는 얘기였다. 혜은이는 그처럼 생김새는 어린 소녀였지만
속마음은 남자들 세계를 속속들이 짚어낸 어른의 면모를 지녔던 것이다(아무튼 나는 눈치 빠른 혜은이 덕분에 제주도공연을 어느 때보다 신나게 보낼
수 있었다!).
또 그녀는 경력을 따져봐도 누구보다 무대연조가 길지만 어디가서도 자신의 '화려한 캐리어'를 떠벌리거나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좀처럼 티를 내지 않는 이러한 자세도 혜은이가 '체구는 작지만 속은 넓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례라고 하겠다.
하지만 워낙
무대라는 것에 대해 도통했던 까닭에 무대여건에는 꼭꼭 원리원칙을 따졌다. “멤버가 좋아야 쇼가 된다”하여 공연에는 찬조가수나 사회자, 코미디언
등 출연자 전원이 일류급이었고 무용수도 방송국의 전속무용단을 채용했을 정도였다.
지난해 밤업소에서 나와 공연했을 때도 무대만은
철저하게 최고로 꾸미려는 예의 그 특성만은 여전했다. '인순이와 리듬터치' 스타일로 두 명의 무용수를 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야간업소임에도 불구하고 마이크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혜은이는 찡그린 표정으로 “아니 요새도 이런 마이크가 있나요? 아저씨?”하며 내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내가 “글쎄나 말이다. 나도 힘들어 죽겠다.” 했더니만 그녀는 “500평 짜리 홀에 마이크가 이게 뭐예요.
세상에, 지금 달나라를 왔다갔다하는 판에 마이크가 이래서 되겠냐구요!”하며 이만저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관록의 무대가수로
스테이지에서는 패티김과 윤복희에 뒤지지 않을 만큼 리드가 뛰어난 가수 혜은이. 돈벌어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효녀가장으로 집안도 책임지는 장한
여가수다. 지난해 방송국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는데 자가용으로 날 태워주면서 “최성일 아저씨. 잘 돼서야 할텐데요.”하고 내 걱정을 한다. 나도
마음 속으로 “혜은이도 잘 돼야 할 텐데.”하며 진심으로 그녀의 인기가 무궁하기를 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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